“페미니즘에 관해 이야기할수록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 ‘남성 혐오(man-hating)’와 동의어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2014년 9월 UN 총회에서 배우 엠마 왓슨이 ‘He for she’라는 주제로 연설한 내용 중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이었다. 도대체 왜,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 남성을 배척하고 혐오하는 일과 연결되고 있는 것일까?
UN 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배우 엠마 왓슨.
한 달 뒤 한국에서는 남성의 ‘여성 혐오’ 현상을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금은 남자가 차별받는 시대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다. 그래서 IS가 좋다.”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말을 남기고 터키로 떠난 10대 소년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팝 칼럼니스트 김태훈은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스트가 더 문제”라는 칼럼으로 도마에 올랐다. 페미니스트에 대한 남성들의 혐오감은 어느 정도이기에 IS라는 극단주의의 대척점에 놓이는 지경이 된 걸까?
이쯤해서 ‘페미니즘’의 정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5년 전 대학 <여성학개론> 수업에 사용됐던 개론서를 펼쳐 뒤적여봤다.
“여성이 사회 속에서 그리고 일상적인 생활세계에서 ‘자신의 미래의 지위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을 의미있게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을 찾아내려는 노력’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래서 여성과 남성이 모두 평등하고 양성의 존재가 다 같이 조화롭고 균형을 이루는 사회를 지향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현대사회와 여성』, 우리사회문화학회, 2001) 본질적으로 페미니즘은 성불평등 없이 남녀가 조화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개념이며, 다만 그동안은 상대적으로 남성에 비해 불평등한 지위에 놓인 여성을 해방하기 위한 이론으로써 작동해왔다는 게 요지다.
페미니즘 운동에는 시대별로 변화의 흐름이 있었다. 18~19세기 자유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페미니즘이나 고전 맑시즘의 관점에서 본 페미니즘은 주로 사회구조적인 변화를 주창했다. 이후에는 다소 급진주의적인 관점의 페미니즘이 등장했는데, 가부장제의 산물인 여성 억압의 문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성중심적인 문화를 타파해야 하기에 여성의 주된 적을 남성으로 상정하는 등 편견의 문제를 낳기도 했다.
이어진 제3의 흐름은 더욱 진전된 개념으로, 여성 문제를 환경오염, 인종차별, 빈곤 등 인류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사회 문제로 보고 남성과 여성의 공동체 의식을 기반으로 해결해가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올바른 페미니즘의 개념은 바로 이 제3의 흐름과 연결되어 있었고, 때문에 페미니즘을 늘 도덕적으로나 운동적 차원에서 정당한 개념으로 이해해왔다.
그런데 요즘 10대 남학생들을 비롯해 많은 남성들에게 페미니스트란 ‘나대기 좋아하고 잘난 척이 심한 여자’(경향신문 2015년 3월 7일자)라는 뜻으로 통용된다고 한다. 언제 이렇게 페미니즘에 대한 정의가 뒤틀려버렸나. 눈을 한 번 더 비비고 봐야 할 정도다. 인터넷에서는 ‘페미년’, ‘꼴페미’ 등 페미니스트 여성을 욕하는 용어가 심심찮게 사용된다. ‘된장녀’, ‘개똥녀’, ‘김치녀’ 등 일반 여성을 비하하는 말들도 ‘신조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곤 한다. 모두 여성에 대한 극심한 혐오감에 기반을 둔 현상이다. 남성은 왜 이렇게 여성을 미워하게 되었을까.
오랜 기간 서구를 중심으로 진화해온 페미니즘 운동의 흐름이 해방 후 한국 사회에 한꺼번에 도입되면서, 한국의 페미니즘은 여러 단계의 페미니즘 운동이 뒤섞인 채로 운용되었다. 1990년대 이후 군 가산점 폐지 문제, 여성부 출범 후의 흐름들은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이 급진적인 운동의 조류로만 다가왔을는지 모르겠다. 실제로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확대되고 여권 신장의 결과가 가시적으로 드러나자, 많은 남성들은 여성에 대해 자신의 ‘밥그릇’을 빼앗는 ‘적’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기 시작했다. 물론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삼는 일부 여성들의 모습도 이런 인식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작동했다고 본다.
하지만 여성의 지위가 수십 년 전의 한국 사회와 비교해 과연 얼마나 높아졌을까. 1970~1980년대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여성의 사회 참여 기회가 확대된 후 이른바 ‘알파걸’로 자라 상위 계층에 편입한 일부 여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한국 여성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일자리에 전전하며 남성 임금 50~60% 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다. 이 밖에도 여전히 가부장제의 잔재가 남은 한국 가정의 문화, 여성 피해자가 대다수인 성폭력 사건들, 성매매 및 성 상품화 문제…. 진작된 일부 여성 권익의 문제 뒤에 숨은 여성의 불평등한 지위 문제는 여전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렇게도 혐오스러운 문제가 되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볼 문제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일 정도의 ‘혐오’에 휩싸이는 동안, 우리 삶에 더욱 본질적인 문제는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를 뒤덮고 있다. 바로 신자유주의 시대가 초래한 ‘노동의 위기’다. 신자유주의는 신성한 노동의 가치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자본으로 대체하는 ‘반노동’적 시스템이다. 과거에 남성들이 갖고 있던 기득권을 자동으로 유지시켜주는 체제가 아니다. 오늘날 남성들의 ‘여성 혐오’ 현상은 경제적 불안정과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을 맞닥뜨리자, 이에 맞서기보다 그 속에서 경쟁자로 등장하기 시작한 여성을 적으로 상정해 배척부터 하고 보자는 데서 비롯됐다.
남성을 ‘루저’로 만드는 것은 여성이 아니다. 여성이 싸우는 것은 남성을 루저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평등한 사회에서 남녀가 함께 공존하고자 스스로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헐뜯고 혐오하느라 에너지를 낭비하는 사이에, 인간다운 삶을 좀먹는 신자유주의라는 거대 괴물은 오늘도 우리를 갉아먹고 있다. 누군가를 루저로 만드는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고 해서 나 아닌 누군가를 끌어내리는 것부터 하고 보자는 사회가 과연 제대로 된 사회일까. 뒤틀린 페미니즘 논쟁에 대한 답은 이 지점에서부터 다시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이 글은 2015년 4월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블로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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