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한창 감수성 예민하고 세상 고민이란 고민은 다 짊어진 것 같았던 때, 전 단짝 친구들 3명과 함께 교환일기라는 것을 썼습니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가장 예쁜 일기장을 고심해서 골라, 4명이서 순서를 정해 돌아가며 일기를 썼죠. 그 속에는 서로의 일상에서부터 각종 고민거리들을 담았습니다.
일기장은 갖은 고민들을 털어놓는 성토장이자, 때로는 서로를 부둥켜 안고 기대어 울 수 있는 가상의 공간이었습니다. '내가 쓴 글에 대해 친구들은 어떤 답글을 써주었을까', '요 녀석들의 요즘 고민은 무엇일까' 기대도 하고, 내게 일기장이 돌아올 순서를 기다리는 설레는 기분은 참 좋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갓 스무살, 대학 입학을 앞둔 우리는 그 교환일기장을 인터넷으로 옮겨다 놨습니다. 2000년, 밀레니엄 시대가 도래하면서 포털 사이트 '다음(daum)'이 한창 유행했거든요. 일기장이 언제쯤 돌아올까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언제든 글을 읽고 답글을 쓸 수 있어 좋았습니다.
지난 주말, 새벽녘에 잠을 설치다 아이폰을 만지작이던 중 어플리케이션 속에 담긴 이 카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평소에도 앱을 자주 이용하긴 했지만, 이 카페에 접속해볼 생각은 못했더랬어요. 당장 내게 필요한 정보가 담긴 곳에만 들어가곤 했지요. 순간 저는, 다락방 먼지 속에 가려져 있던 편지 꾸러미를 찾은 듯한 기분으로, 과거로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가장 오래된 글은 2000년 1월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그 공간에는 곧 다가올 대학생활에 대한 설렘이 가득했습니다. 몇달이 지나 1학년이 된 우리의 글에서는 각종 사회 문제에 눈을 뜬 스무살 청춘의 고뇌와 번민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투박하기 짝이 없는, 어설프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철학을 끄적인 글도 있었고, 등록금 투쟁 집회에 참석하거나 매향리, 양민학살지로 순례를 떠났던 일도 적혀 있었습니다.
지금 다시 읽어보면 부끄러워지는 대목도 있네요. 하지만 왠지 '청춘'의 기운이 느껴져서 옮겨봅니다.
"술 먹고 버스 안에서 자다가 가까스로 정류장 안 지나치고 내렸는데, 걷다가 졸아서 인도에서 90도로 퍽~하고 고꾸라졌다. 근데... 한번 엎어지고 나니까 정신이 버쩍 들더라. 살면서, 한번쯤은 확 하니 고꾸라지고 볼일이다."(2001년)
또 몇달이 지나자, 카페는 각종 연애상담 코너로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사랑과 이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축하와 위로가 반복되었죠. 어찌나 절절하고 애틋한지, 다들 웬만한 영화는 한번씩 찍었군요. 도무지 간지러워서 두번은 못 읽겠습니다.ㅋ
친구들과의 카페 첫 대문사진. 닭살스럽지만 포근했답니다.ㅋ
졸업을 앞두고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가득했고, 점차 글의 갯수는 줄어들었네요. 제가 친구 중 처음으로 취직을 하자, 한 친구는 요렇게 축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다시 보니 귀엽습니다. ㅋㅋㅋ
"축하축하 초축하. 드디어 고은이가 백수탈출의 첫 스타트를 끊었구나. 이를 계기로 우리 모두 줄줄이 비엔나처럼 백수신분을 탈출할 수 있길 바라며... 첫 월급 받으면 내복 사고 남은 돈으로 한턱 쏴라 쏴쏴쏴~~~" (2005)
이따금 올라온 글은 사회 생활의 고달픔이나 결혼에 대한 고민도 적혀 있었습니다. 2008년에는 한 친구의 결혼식에서 부를 축가를 연습하기 위해 '원격' 회의를 했던 흔적이 있었고, 마지막 글은 2010년에 함께 떠났던 부산 여행과 관련한 기록이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미디어 기술의 변화도 느껴집니다. 처음엔 게시판에 댓글 기능이 없어서 글 밑에 'Re:'라는 답글만 달 수 있었네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답글들에서 서로에 대한 애정이 물씬 묻어납니다. 댓글 기능이 생긴 뒤로는 간편하게 댓글로 한마디씩 첨언하곤 했습니다.
희한한 기분이 들었던 건, 10년 전 썼던 글에 지금도 댓글을 달 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서른 두살 지금의 제가, 스무살의 저 자신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셈이랄까요. 여러분도 예전에 가입했다가 한동안 들어가보지 않은 카페나 온라인 공간에 다시 한번 들어가보세요. 그 시절의 나와 바로 마주하는 기분이 듭니다.
열여덟의 풋풋하던 소녀들은 이제 절반 이상이 '유부녀'가 되었습니다. 그중 두명은 '엄마'라는 이름도 얻었고요. 그리고 이제 우리는 더이상 카페에는 글을 올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경향신문 DB. 모두에게 여고시절 사진은 평생 극비에 부쳐져야 하므로 자료사진으로 대체합니다. 후후.
대신 우리는 이제 그 '교환일기장'을 매일같이 접속하는 페이스북으로 옮겨다놓았습니다. 그곳에서 친구의 일상과, 아이가 커가는 모습과, 고민과 단상들을 나눕니다. 시간이 흐르고 모양이 바뀌었지만, 어떤 공간 안에서 담고 싶고 나누고 싶은 사람의 마음은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날 새벽 아침 동이 트기 전에 카페에 글 한편을 썼습니다. 저처럼, 친구 중 누군가가 우연히 카페를 찾아왔을 때 반가운 기분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그런데 그 옛날의 교환일기장도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인생을 궁금해하고, 글솜씨는 너무 엉망진창이어서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를 글을 끄적였을, 그때의 그 일기를요. 10대의 저와 마주해보는 일도 꽤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다음에 친구들을 만나면 누군가의 창고에 쌓여있을 그 일기장을 꼭 함께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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냥이 2012.05.01 17: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일기장 친정온 길에 마침 찾아두었다..흘흘흘.....담에 갖고갈게ㅋㅋ
ㅎㅎ 너한테 있었군. 보고싶당!
딸기 2012.05.02 18: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야... 교환일기, 고은이도 썼구나. ^^
저거 원래 마르탱 뒤 갸르의 소설 '회색노트'에 나온 거야. 당시 로망처럼 보였던 전혜린이 책에다가 회색노트 이야기를 쓰면서 엄청 유행... 그래서 우리 때는 (마르탱 뒤 갸르는 몰라도) 다들 회색노트라고 불렀어.
그러고 보니 대학 때 교환일기 썼던 내 친구는 지금 영국에 가 있네... 고은 덕에 여러가지 추억을 떠올리게 됐다. 땡큐.
* 그런데 지금 재미삼아(미안) 이고은 스토킹을 해보니까, 대학 때 과학생회장을 했네? 역시 대단...
역시 선배는 걸어다니는 딕셔너뤼~~~!!! 선배 덕에 또 하나 알게 됐군요.ㅋㅋ
*저의 모범장군적 기질이 발휘되는 순간이었죠.ㅋ 남자후배들이 저더러 '고은이형'이라고 불렀어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