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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에 관해 이야기할수록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 남성 혐오(man-hating)’와 동의어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20149UN 총회에서 배우 엠마 왓슨이 ‘He for she’라는 주제로 연설한 내용 중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이었다. 도대체 왜,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 남성을 배척하고 혐오하는 일과 연결되고 있는 것일까?



UN 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배우 엠마 왓슨.


한 달 뒤 한국에서는 남성의 여성 혐오현상을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금은 남자가 차별받는 시대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다. 그래서 IS가 좋다.”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말을 남기고 터키로 떠난 10대 소년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팝 칼럼니스트 김태훈은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스트가 더 문제라는 칼럼으로 도마에 올랐다. 페미니스트에 대한 남성들의 혐오감은 어느 정도이기에 IS라는 극단주의의 대척점에 놓이는 지경이 된 걸까?


이쯤해서 페미니즘의 정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5년 전 대학 <여성학개론> 수업에 사용됐던 개론서를 펼쳐 뒤적여봤다.


여성이 사회 속에서 그리고 일상적인 생활세계에서 자신의 미래의 지위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을 의미있게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을 찾아내려는 노력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래서 여성과 남성이 모두 평등하고 양성의 존재가 다 같이 조화롭고 균형을 이루는 사회를 지향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현대사회와 여성, 우리사회문화학회, 2001) 본질적으로 페미니즘은 성불평등 없이 남녀가 조화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개념이며, 다만 그동안은 상대적으로 남성에 비해 불평등한 지위에 놓인 여성을 해방하기 위한 이론으로써 작동해왔다는 게 요지다.


페미니즘 운동에는 시대별로 변화의 흐름이 있었다. 18~19세기 자유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페미니즘이나 고전 맑시즘의 관점에서 본 페미니즘은 주로 사회구조적인 변화를 주창했다. 이후에는 다소 급진주의적인 관점의 페미니즘이 등장했는데, 가부장제의 산물인 여성 억압의 문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성중심적인 문화를 타파해야 하기에 여성의 주된 적을 남성으로 상정하는 등 편견의 문제를 낳기도 했다.


이어진 제3의 흐름은 더욱 진전된 개념으로, 여성 문제를 환경오염, 인종차별, 빈곤 등 인류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사회 문제로 보고 남성과 여성의 공동체 의식을 기반으로 해결해가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올바른 페미니즘의 개념은 바로 이 제3의 흐름과 연결되어 있었고, 때문에 페미니즘을 늘 도덕적으로나 운동적 차원에서 정당한 개념으로 이해해왔다.


그런데 요즘 10대 남학생들을 비롯해 많은 남성들에게 페미니스트란 나대기 좋아하고 잘난 척이 심한 여자’(경향신문 201537일자)라는 뜻으로 통용된다고 한다. 언제 이렇게 페미니즘에 대한 정의가 뒤틀려버렸나눈을 한 번 더 비비고 봐야 할 정도다인터넷에서는 페미년’, ‘꼴페미등 페미니스트 여성을 욕하는 용어가 심심찮게 사용된다. ‘된장녀’, ‘개똥녀’, ‘김치녀등 일반 여성을 비하하는 말들신조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곤 한다. 모두 여성에 대한 극심한 혐오감에 기반을 둔 현상이다. 남성은 왜 이렇게 여성을 미워하게 되었을까.


오랜 기간 서구를 중심으로 진화해온 페미니즘 운동의 흐름이 해방 후 한국 사회에 한꺼번에 도입되면서, 한국의 페미니즘은 여러 단계의 페미니즘 운동이 뒤섞인 채로 운용되었다. 1990년대 이후 군 가산점 폐지 문제, 여성부 출범 후의 흐름들은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이 급진적인 운동의 조류로만 다가왔을는지 모르겠다. 실제로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확대되고 여권 신장의 결과가 가시적으로 드러나자, 많은 남성들은 여성에 대해 자신의 밥그릇을 빼앗는 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기 시작했다. 물론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삼는 일부 여성들의 모습도 이런 인식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작동했다고 본다.




하지만 여성의 지위가 수십 년 전의 한국 사회와 비교해 과연 얼마나 높아졌을까. 1970~1980년대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여성의 사회 참여 기회가 확대된 후 이른바 알파걸로 자라 상위 계층에 편입한 일부 여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한국 여성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일자리에 전전하며 남성 임금 50~60% 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다. 이 밖에도 여전히 가부장제의 잔재가 남은 한국 가정의 문화, 여성 피해자가 대다수인 성폭력 사건들, 성매매 및 성 상품화 문제. 진작된 일부 여성 권익의 문제 뒤에 숨은 여성의 불평등한 지위 문제는 여전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렇게도 혐오스러운 문제가 되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볼 문제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일 정도의 혐오에 휩싸이는 동안, 우리 삶에 더욱 본질적인 문제는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를 뒤덮고 있다. 바로 신자유주의 시대가 초래한 노동의 위기. 신자유주의는 신성한 노동의 가치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자본으로 대체하는 ‘반노동’적 시스템이다. 과거에 남성들이 갖고 있던 기득권을 자동으로 유지시켜주는 체제가 아니다. 오늘날 남성들의 ‘여성 혐오 현상은 경제적 불안정과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을 맞닥뜨리자, 이에 맞서기보다 그 속에서 경쟁자로 등장하기 시작한 여성을 적으로 상정해 배척부터 하고 보자는 데서 비롯됐다.


남성을 루저’로 만드는 것은 여성이 아니다. 여성이 싸우는 것은 남성을 루저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평등한 사회에서 남녀가 함께 공존하고자 스스로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헐뜯고 혐오하느라 에너지를 낭비하는 사이에, 인간다운 삶을 좀먹는 신자유주의라는 거대 괴물은 오늘도 우리를 갉아먹고 있다. 누군가를 루저로 만드는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고 해서 나 아닌 누군가를 끌어내리는 것부터 하고 보자는 사회가 과연 제대로 된 사회일까. 뒤틀린 페미니즘 논쟁에 대한 답은 이 지점에서부터 다시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이 글은 2015년 4월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블로그에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이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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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경외스러운 존재가 있다면 성직자와 경제학자 정도입니다. 고기를 좋아라하고 물욕에 사로잡혀 인터넷 쇼핑을 끊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인 제가 성직자를 경외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겁니다. 
그런데 경제학자도 제겐 경외스럽습니다. 환율, 금리 등 기초적인 경제학 용어인데도 왠지 어렵게 느껴지거든요. 두려움은 경외감과 일정부분 상통하는 부분이 있는걸까요. 멀게만 느껴지는 경제학을 공부하는 경제학자란 그래서 경외의 대상이 됩니다.

지난달 28일 신간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펴낸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의 기자간담회를 다녀왔습니다.
2007년에 낸 <나쁜 사마리아인들> 이후 3년만의 책이라 그런지 언론의 관심이 무척 뜨거웠습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던 장 교수였는데, 마침 두 책 사이에는 세계금융위기라는 큼지막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의 관점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출간한 장하준 교수. 김문석 기자



장 교수는 참 쉽고 간결하게 경제학을 말합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저까지 막 똑똑해지는 느낌이 들게 됩니다.

예컨대 이렇습니다.

같은 일을 하지만 스웨덴의 버스기사와 인도의 버스기사 사이에는 50배의 임금차가 납니다. 사실 운전 실력만 따져보면 잘 포장된 도로를 달리기만 하면 되는 스웨덴의 버스기사보다 복잡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며 길거리의 소떼와 부랑자를 피해 운전하는 인도의 버스기사가 한 수 위일 수도 있습니다. “생산성이 높으면 보수도 높다”는 시장주의 경제학의 명징한 원칙이 무너지는 사례죠. 장 교수는 이런 현상의 이유를 부자 나라의 이민 통제 정책 등 ‘보호주의’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또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것은 그 나라의 가난한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상 빈곤은 그 나라의 부자들 때문이라고 꼬집습니다. 그렇다고 부자 나라의 부자들이 뛰어나고 잘나서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부자 나라의 부는 뛰어난 개인의 역량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가 일구어 놓은 좋은 제도들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맞는 말 같습니다. 좀 더 볼까요. 장 교수는 “(우리나라가) 귀찮은 제조업을 버리고 탈산업화시대라는 이유로 금융을 해서 먹고 살자고 하는데 그건 아니다”라고 잘라 말합니다. 제조업이 구시대 산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주장입니다.

때문에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는 이색적인 주장을 폅니다. 세탁기를 비롯한 가전 제품은 가사노동 시간을 대폭 줄였잖아요. 그래서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을 촉진시켰고, 인간의 생활 양식과 사회구조를 크게 바꿔놓았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인터넷은 정보 전달속도를 높이거나 인간의 여가생활의 질을 향상시킨 것 정도 외에는 세탁기만큼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거죠.
장 교수는 최근의 것에만 사로잡혀 이제 보편화된 것들을 저평가할 경우 여러가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고 경고합니다.

장 교수의 책을 읽다보면 현실의 시장주의 경제학이 얼마나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지 느끼게 됩니다. IT 운운하며 세계의 흐름이 바뀐 것처럼 떠들어대는 우리가 아직 제조업조차 제대로 서지 못한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을 세계 경제에서 완전히 소외시키고 있음도 알게 되고요.

이런 바탕으로 장 교수는 한·미 FTA, 부자 감세, 보편적 복지, 마이크로 크레딧 등 국내 경제 현안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아주 속이 시원합니다. 기사보기

전작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신랄하게 ‘나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던 장 교수의 어법은 이번 책에서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을 하나씩 들춰내 잘근잘근 분석하는 방식으로 조금 선회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복잡하고 어려운 모순들이 쉽고도 논리적으로 정리되는 느낌이 드네요.

제가 경제학을 경외하게 된 것은, 아마 처음 경제학을 접할 때 장 교수와 같은 좋은 선생님을 만나지 못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젠 좀 즐겁게 경제학을 공부해볼까 합니다. (책 광고 아닙니다;;)

2010-11-02

Posted by 이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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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의 힘… 존 포데스타 | 한겨레출판

 

미국 오바마 정부가 추진해온 의료보험 개혁안이 지난달 난항 끝에 하원을 통과했다. 의료보험 개혁은 1912년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처음 대선공약으로 내건 것으로 100년 가까이나 표류한 정책이다. 그만큼 의료보험 개혁안은 미국 내 진보 세력의 오랜 열정이 담긴 정책이고, 이 때문에 개혁안의 통과는 미국 진보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연 역사로 기록된다.

오바마 시대가 열렸지만, 미국식 신자유주의에 익숙해진 오늘날 ‘미국’과 ‘진보’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말 같다. 하지만 미국 민주당 내 핵심 브레인 존 포데스타는 <진보의 힘>에서 미국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성장시킨 동력이 진보주의였음을 역사를 통해 설명한다. 그는 클린턴 정부 시절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하고 오바마 정부 출범시 인수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바 있는 진보주의 인사로, 가난한 이민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가정에서 자랐다.

포데스타는 미국이 성장할 수 있었던 힘이 “경제적 특권을 누리는 이익 집단의 정부 장악을 깨고 미국 민주주의의 뿌리를 회복하는 데 관심을 쏟는” 진보주의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중산층 보호 장치를 후퇴시킨 “보수주의가 미국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현 오바마 정부의 새로운 진보주의가 미국의 변화와 성숙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그는 초기 진보주의 시대와 달리, “지금의 새로운 진보주의 시대는 군사적·도덕적으로 세계 지도자로서 미국의 임무를 되찾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진보 정책이 결국 ‘위대한 미국’으로 가는 길로 향함을 확인하는 것은 다소 불편하다. 그러나 저자가 현실 정치가라는 측면에서 볼 때, 책은 미국이 향후 무엇을 향해 어떻게 나아갈지를 현실적으로 내다볼 수 있는 지침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김현대 옮김. 1만2000원

이고은 기자 freetree@kyunghyang.com

Posted by 이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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