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오랜만의 업뎃입니다. 최순실, 정유라, 길라임, 비아그라... 박근혜 대통령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말도 안 되는 관련어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깊은 분노와 허탈감을 느꼈습니다. 제가 지금 블로그를 열어 무엇이라도 쓰게끔 만든 힘이지요. '길라임'으로 이 감정의 정점을 찍을무렵, 드라마 <시크릿가든>에 대해 끄적댔던 죽어있는 제 블로그를 떠올렸습니다.

 

최순실의 존재를 통해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의문들이 일거에 풀렸습니다. 이런 생각도 들었죠. '아, 내 꽃같은 청춘 20대에 무슨 뻘짓을 했던가?' 블로그에 예전에 포스팅했던 적이 있지만, 저는 제가 20대였던 2007~2009년 박근혜 당시 전 한나라당 대표를 담당하는 마크맨이었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박근혜 담당이라기보다 '친박(親朴)' 담당이라고 보는 것이 맞았습니다. 당시에도 박 대통령은 물리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한 취재원이었기에 늘 그의 발언과 의중을 알려면 박 대통령 주변인을 취재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주변인이란 원조 친박으로 불렸지만 지금은 비박계 대표인물이 된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과 유승민 의원도 있었고, 새누리당 대표인 이정현 의원도 있었습니다. 당시 박근혜 담당 기자들은 이들의 의견을 청취하며 박 대통령의 생각을 읽으려 노력했습니다. 이혜훈 의원, 구상찬 전 의원도 매일같이 통화하던 이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최순실의 존재와 전횡에 대해 알고 있었을 이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더한 분노가 끓습니다만.)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당시 박근혜 캠프 담당 기자들 사이에는 "박 캠프 사람들은 '박근혜 뽕'을 심하게 맞은 것 같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박 대통령에 대한 신비주의와 신격화의 정도가 무척 심했기 때문이죠. 이들 중 특히 이정현 대표(당시 대변인)의 '뽕'은 가장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차움병원 스캔들을 지켜보다가, 경선에 패한 후 후일을 도모하던 시점에 이 대표와 나누었던 대화(=수다)가 떠올라 흠칫하더군요.

 

 

"우리 대표님이 참 완벽한 피사체지? 사진기자들이 이리 찍어도 저리 찍어도 너무 잘 나온다고 그러데. 그런데 2012년 대선 때는 대표님이 환갑이야. 그때 할머니처럼 보일까봐 걱정이야. 그러면 누가 찍어주겠냐고... 주름 막 패이고 그러면 어떡해~."

 

당시만 해도 박 대통령의 이미지는 청렴, 무욕(無慾), 원칙... 뭐 이런 단어로 설명될 정도로 피부 미용이나 '여성의 사생활'과는 참 무관해보였더랬죠. 그래서 이 대표가 그때 그런 말을 할 때 '아, 참모들은 참 별것도 다 고민해야 하는구나...' 하고 웃어넘겼는데, 지금 와서 보니 박 대통령 본인도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얼굴 주름 고민을 해왔던 게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지지율과 피부 미용 사이에 적잖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이미 예전부터 간파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결국 제 허탈감의 근원엔 첫번째로 최순실이 있습니다. 당시에도 '강남팀' 등의 이름으로 비선의 존재에 대해 조금 알려지긴 했지만 너무 베일에 싸여있어서 함부로 말을 꺼내기 힘든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알고자 했던 박 대통령의 의중이 사실은 모두 최 선생님의 것이었다니요... 20대 시절에 애인보다도 더 많이 통화하던 정치인들의 이야기가 사실은 모두 추측과 상상의 소산이었음을 안 제 심정이 어땠을 것 같습니까? 허허...탈탈...

 

 

박근혜의 신비주의, 언제 깨질까?

다시보니 너무 소심하고 점잖게 쓴 지난 2011년의 포스팅;;;

 

 

두번째로는 한국사회에 대해 가졌던, 그러나 무너진 기대감 때문에 허탈했습니다. 여기서 이제 제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려는데요. 저는 지난 6월에 회사에 사표를 내서 더이상 신문기자가 아닙니다. 두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한 선택입니다. 기자를 꿈꾸던 시절부터 기자로 일해온 시간까지 합치면 거의 20년간 제 인생을 설명해온 키워드인 '기자'라는 이름을 이제는 내려놓게 됐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이 사회의 모순과 문제점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합니다. 북유럽 사회를 꿈꾸는 많은 한국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다름아니라 아이 키우기 좋은 사회, 아니 다시 말해 '일과 육아를 함께 할 수 있는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아이가 없다면 '일과 개인적 생활의 균형이 있는 사회'일 수도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여성이 일도 육아도 잘 해내려면 오로지 개인적인 '노오력'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여성 혼자서 이를 해내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사회와 국가가 적극적인 지원이 뒤따라야 합니다.

 

적극적인 지원이란 게 어린이집을 확충하고 보육비를 더주고,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현재 우리 정부는 "아이는 국가가 키울테니 엄마 아빠는 직장에서 뼈빠지게 일하세요"라는 노선을 취하고 있는데, 궁극적으로 언젠가는 엄마 아빠가 직접 아이들을 돌볼 수 있고 일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구조로 바뀌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변화는 국가, 정부가 만들어낼 수 있고요.

 

저는 우리 사회가 언젠가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런 생각들을 담아 애들 뒤치다꺼리로 바쁜 와중에도 쪽잠자며 <요즘 엄마들>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제 기대와 믿음이 얼마나 컸으면 책까지 썼겠습니까.

 

 

그런데 작금의 시대 상황은 제 이런 기대가 너무도 허황하고 순진한 것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우리 정부가, 저처럼 평범한 국민이 보다 인간적이고 행복한 삶을 꿈꾸며 그 기대감을 표현하며 변화를 촉구한다고 한들, 귓등으로라도 들었을까 싶습니다. 노동소득이 자본소득을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구조, 자본이 없는 맞벌이 부부는 아이를 남에게 맡겨두고 끊임없이 노동해야 하는 구조. 우리 정부는 이 구조를 더욱 공고화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기업의 삥을 뜯는 댓가로 세제 혜택을 주고 경영권 승계 문제에 관대한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기업만 배불리고 노동시장을 유연화한다는 핑계로 노동자만 쥐어짜는 구조를 확고히 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정부에, 이 정부의 대통령에게, 제 기대와 믿음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이었을까요.

 

알고보니 최순실은 이렇게 제 삶에 깊숙이 파고 들어 있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며 살아숨쉬어 왔겠죠. 생각하면 속이 너무 답답해 2살, 4살짜리 아이들을 데리고 광화문에도 다녀왔습니다. 박 대통령이 언제까지 버틸지 모르겠습니다만, 짧게나마 제가 관찰해온 그는 다른 많은 사람들의 예측처럼 절대 스스로 물러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제 남은 건 이유도 모른 채 최순실 때문에 울었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끈기'뿐입니다. 뿌리 깊은 친일, 수구보수 세력이 설계하고 운영해온 한국 사회의 민낯을 이참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알게 되었으니,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어디에서부터 무엇을 바로잡아야할지 보다 많은 사람이 공감했으니, 더 많은 가능성이 생긴 게 아닐까 희망도 가져봅니다. 물론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릴 수도 있겠지요. 당장 다음 대선, 혹은 몇 년 안에 대단한 변화를 바라는 것 역시 순진한 기대일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돈이 최고이고 경쟁과 배제가 만연한 세상살이 와중에, 광화문의 촛불을 보면서 우리가 참 오랜만에 '인간다운' 순간을 맞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피켓을 보니 "국민이 이긴다"고 쓰여있더군요. 구중궁궐에 숨은 그분은 그 문구를 보고 코웃음 칠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서서히, 언젠가는 국민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 재우고 끄적댔습니다. 이제 백수가 된 애 엄마인 저는... 앞으로 종종 블로그에 흔적을 남기려 합니다. 사는 이야기들, 편안하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Life > interview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순실이 제 블로그를 살렸습니다!  (0) 2016.11.24
교환일기를 아시나요  (4) 2012.05.01
폭우, 고난의 출근길  (4) 2011.07.27
웃으면 진짜 복이 올까?  (1) 2011.06.20
아버지와 노무현  (12) 2011.05.23
환상속의 그대, 서태지  (0) 2011.04.22
Posted by 이고은

댓글을 달아 주세요

고등학교 2학년. 한창 감수성 예민하고 세상 고민이란 고민은 다 짊어진 것 같았던 때, 전 단짝 친구들 3명과 함께 교환일기라는 것을 썼습니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가장 예쁜 일기장을 고심해서 골라, 4명이서 순서를 정해 돌아가며 일기를 썼죠. 그 속에는 서로의 일상에서부터 각종 고민거리들을 담았습니다.


일기장은 갖은 고민들을 털어놓는 성토장이자, 때로는 서로를 부둥켜 안고 기대어 울 수 있는 가상의 공간이었습니다. '내가 쓴 글에 대해 친구들은 어떤 답글을 써주었을까', '요 녀석들의 요즘 고민은 무엇일까' 기대도 하고, 내게 일기장이 돌아올  순서를 기다리는 설레는 기분은 참 좋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갓 스무살, 
대학 입학을 앞둔 우리는 그 교환일기장을 인터넷으로 옮겨다 놨습니다. 2000년, 밀레니엄 시대가 도래하면서 포털 사이트 '다음(daum)'이 한창 유행했거든요. 일기장이 언제쯤 돌아올까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언제든 글을 읽고 답글을 쓸 수 있어 좋았습니다.


지난 주말, 새벽녘에 잠을 설치다 아이폰을 만지작이던 중 어플리케이션 속에 담긴 이 카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평소에도 앱을 자주 이용하긴 했지만, 이 카페에 접속해볼 생각은 못했더랬어요. 당장 내게 필요한 정보가 담긴 곳에만 들어가곤 했지요.  순간 저는, 다락방 먼지 속에 가려져 있던 편지 꾸러미를 찾은 듯한 기분으로, 과거로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가장 오래된 글은 2000년 1월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그 공간에는 곧 다가올 대학생활에 대한 설렘이 가득했습니다. 몇달이 지나 1학년이 된 우리의 글에서는 각종 사회 문제에 눈을 뜬 스무살 청춘의 고뇌와 번민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투박하기 짝이 없는, 어설프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철학을 끄적인 글도 있었고, 등록금 투쟁 집회에 참석하거나 매향리, 양민학살지로 순례를 떠났던 일도 적혀 있었습니다.


지금 다시 읽어보면 부끄러워지는 대목도 있네요. 하지만 왠지 '청춘'의 기운이 느껴져서 옮겨봅니다.


"술 먹고 버스 안에서 자다가 가까스로 정류장 안 지나치고 내렸는데, 걷다가 졸아서 인도에서 90도로 퍽~하고 고꾸라졌다. 근데... 한번 엎어지고 나니까 정신이 버쩍 들더라. 살면서, 한번쯤은 확 하니 고꾸라지고 볼일이다."(2001년)


또 몇달이 지나자, 카페는 각종 연애상담 코너로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사랑과 이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축하와 위로가 반복되었죠. 어찌나 절절하고 애틋한지, 다들 웬만한 영화는 한번씩 찍었군요. 도무지 간지러워서 두번은 못 읽겠습니다.ㅋ


친구들과의 카페 첫 대문사진. 닭살스럽지만 포근했답니다.ㅋ



졸업을 앞두고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가득했고, 점차 글의 갯수는 줄어들었네요. 제가 친구 중 처음으로 취직을 하자, 한 친구는 요렇게 축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다시 보니 귀엽습니다. ㅋㅋㅋ


"축하축하 초축하. 드디어 고은이가 백수탈출의 첫 스타트를 끊었구나. 이를 계기로 우리 모두 줄줄이 비엔나처럼 백수신분을 탈출할 수 있길 바라며... 첫 월급 받으면 내복 사고 남은 돈으로 한턱 쏴라 쏴쏴쏴~~~" (2005)


이따금 올라온 글은 사회 생활의 고달픔이나 결혼에 대한 고민도 적혀 있었습니다. 2008년에는 한 친구의 결혼식에서 부를 축가를 연습하기 위해 '원격' 회의를 했던 흔적이 있었고, 마지막 글은 2010년에 함께 떠났던 부산 여행과 관련한 기록이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미디어 기술의 변화도 느껴집니다. 처음엔 게시판에 댓글 기능이 없어서 글 밑에 'Re:'라는 답글만 달 수 있었네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답글들에서 서로에 대한 애정이 물씬 묻어납니다. 댓글 기능이 생긴 뒤로는 간편하게 댓글로 한마디씩 첨언하곤 했습니다.


희한한 기분이 들었던 건, 10년 전 썼던 글에 지금도 댓글을 달 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서른 두살 지금의 제가, 스무살의 저 자신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셈이랄까요. 여러분도 예전에 가입했다가 한동안 들어가보지 않은 카페나 온라인 공간에 다시 한번 들어가보세요. 그 시절의 나와 바로 마주하는 기분이 듭니다.


열여덟의 풋풋하던 소녀들은 이제 절반 이상이 '유부녀'가 되었습니다. 그중 두명은 '엄마'라는 이름도 얻었고요. 그리고 이제 우리는 더이상 카페에는 글을 올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경향신문 DB. 모두에게 여고시절 사진은 평생 극비에 부쳐져야 하므로 자료사진으로 대체합니다. 후후.

 

대신 우리는 이제 그 '교환일기장'을 매일같이 접속하는 페이스북으로 옮겨다놓았습니다. 그곳에서 친구의 일상과, 아이가 커가는 모습과, 고민과 단상들을 나눕니다. 시간이 흐르고 모양이 바뀌었지만, 어떤 공간 안에서 담고 싶고 나누고 싶은 사람의 마음은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날 새벽 아침 동이 트기 전에 카페에 글 한편을 썼습니다. 저처럼, 친구 중 누군가가 우연히 카페를 찾아왔을 때 반가운 기분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그런데 그 옛날의 교환일기장도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인생을 궁금해하고, 글솜씨는 너무 엉망진창이어서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를 글을 끄적였을, 그때의 그 일기를요. 10대의 저와 마주해보는 일도 꽤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다음에 친구들을 만나면 누군가의 창고에 쌓여있을 그 일기장을 꼭 함께 읽어봐야겠습니다.


'Life > interview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순실이 제 블로그를 살렸습니다!  (0) 2016.11.24
교환일기를 아시나요  (4) 2012.05.01
폭우, 고난의 출근길  (4) 2011.07.27
웃으면 진짜 복이 올까?  (1) 2011.06.20
아버지와 노무현  (12) 2011.05.23
환상속의 그대, 서태지  (0) 2011.04.22
Posted by 이고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냥이 2012.05.01 17: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일기장 친정온 길에 마침 찾아두었다..흘흘흘.....담에 갖고갈게ㅋㅋ

  2. 딸기 2012.05.02 18: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야... 교환일기, 고은이도 썼구나. ^^
    저거 원래 마르탱 뒤 갸르의 소설 '회색노트'에 나온 거야. 당시 로망처럼 보였던 전혜린이 책에다가 회색노트 이야기를 쓰면서 엄청 유행... 그래서 우리 때는 (마르탱 뒤 갸르는 몰라도) 다들 회색노트라고 불렀어.
    그러고 보니 대학 때 교환일기 썼던 내 친구는 지금 영국에 가 있네... 고은 덕에 여러가지 추억을 떠올리게 됐다. 땡큐.

    * 그런데 지금 재미삼아(미안) 이고은 스토킹을 해보니까, 대학 때 과학생회장을 했네? 역시 대단...

    • 이고은 2012.05.02 19: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 선배는 걸어다니는 딕셔너뤼~~~!!! 선배 덕에 또 하나 알게 됐군요.ㅋㅋ

      *저의 모범장군적 기질이 발휘되는 순간이었죠.ㅋ 남자후배들이 저더러 '고은이형'이라고 불렀어요.ㅠㅠ

오늘 출근길은 정말 고난의 길이었다. 평소 1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인데, 엄청나게 쏟아부은 폭우 때문에 총 3시간 30분이나 소요된 머나먼 장정이 되고 말았다. 어제 퇴근길에 선배와 함께 집에 가면서 쏟아지는 비를 보며 “이러다 무슨 일 나는 거 아니야…”라고 이야기나누었는데, 내 일이 될 줄이야.

8시30분쯤 집을 나섰다. 버스를 한대 놓친 뒤, 10분쯤 기다려 8시40분쯤 김포에서 신촌으로 향하는 경기도 버스를 탔다. 김포에서 올림픽대로까지 나가는 길까지는 별 무리가 없었다. 평소대로 무탈하게 20분쯤 걸려 9시쯤 올림픽대로로 진입하려는데, 이게 뭔가 심상치 않았다.

행주대교 남단 올림픽대로 인근에는 공사가 한창. 갑자기 버스가 멈춰서더니, 굼벵이 걸음보다 느리게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사 때문에 넘쳐흐른 흙탕물에 자동차 바퀴가 반 이상 잠길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비로 침수된 동부간선도로. 연합뉴스


어쨌건 겨우겨우 올림픽대로로 버스가 올라가긴 했는데, 이게 또 웬 일. 아까만큼 느린 속도로 차가 움직이는 거다. 사태 파악이 안 된 나는 ‘비때문에 평소보다 좀 막히는구나’ 싶어 유유히 아이폰으로 음악을 듣고, 가방 속을 뒤적여 읽다만 <아웃라이어>를 꺼내들었다.

여유롭게 책을 읽으며 생기지도 않은 2세를 위해 교육방법을 구상하던 중, 1시간이 지나도 아직 올림픽대로 위에 있길래 뭔가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붉은 색의 ‘방화대교’가 보이는 게 아닌가? 행주대교에서 방화대교까지 약 1km 거리, 1km 움직이는데 1시간이라니 걸어가는 편이 훨씬 빨랐을 거라는 말.

더군다나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우리 차 방향으로는 차들이 빽빽히 막혔지만 반대 방향에서 오는 차는 한대 찾아보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버스에 자리가 없어 내내 서서 가던 승객들은 버스 아저씨의 안내로 올림픽대로 한복판에서 내려 옆을 지나는 같은 노선의 버스로 옮겨탔다.

무슨 상황인가 싶어 뉴스를 찾아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졌고 강남 일대 곳곳에 심각한 피해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지만 당장 내가 있는 이곳, 올림픽대로 상황은 알 수 없었다.

트위터리안 @appcokr이 트위터에 올린 사진


트위터에 들어가보니 서울의 온갖 참상을 볼 수 있었다. 
2006년 강원도로 수해지역 취재를 떠났던 때 보았던 참상과 서울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생이 사는 강남쪽은 난리도 아니었다. 대치동, 서초동, 강남역 일대, 은마아파트 앞 등등 시시각각 트위터리안들이 찍은 물난리 사진과 동영상이 생생하게 올라와있었다. 다행히 동생은 자신의 
‘안전’을 알려왔다. 

서울 시내가 온통 아수라장이다 보니, 자연히 오세훈 시장에 대한 비판을 담은 멘션도 자주 눈에 띄었다. 그 와중에 서울시는 우면산 등을 찾은 오 시장의 오늘 일정과 동선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트위터리안 @jinkih이 트위터에 올린 사진


멘션을 뒤지다보니 올림픽대로 상황을 알 수 있는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부근에 물이 잠겨 차들이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을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차는 꽉 막히고, 반대 방향에서는 차가 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는 사진이었다.

회사 트위터 계정으로 이 멘션을 RT했다. 삽시간에 퍼져나가는 멘션을 보니, 속보 상황에서 SNS이 발휘하는 힘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올림픽대로는 대략 이런 상황. 연합뉴스


장장 3시간이 걸려 11시45분쯤 양화대교를 통해 합정역 방향으로 진입했다. 제 속도를 찾아 달리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한강은 흙탕물 천지였다. 물지옥을 빠져나온 느낌이었다. 버스에 가만이 앉아 온 내 기분도 이럴진대, 침수지역의 주민들의 심정은 오죽할까 싶다. 부디 더 이상의 피해가 없었으면
….

사회부에서 '지옥같은 출근기' 모으길래 써서 보냈다.
주차장 올림픽대로, 1시간 동안 1㎞ 이동…경기도 출근기


 

'Life > interview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순실이 제 블로그를 살렸습니다!  (0) 2016.11.24
교환일기를 아시나요  (4) 2012.05.01
폭우, 고난의 출근길  (4) 2011.07.27
웃으면 진짜 복이 올까?  (1) 2011.06.20
아버지와 노무현  (12) 2011.05.23
환상속의 그대, 서태지  (0) 2011.04.22
Posted by 이고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명일 2011.07.27 16: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점심약속이 왜 미뤄졌는지 이유는 안들어도 알 수 있었죠. 저는 전날 야근이어서 출근이 늦어 그나마 수월하게 왔어요. 폭우 뚫고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2. 2011.07.28 00: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경향신문 기자분들 폭우 출근기 기사 몇개 봤었는뎅...
    언냐 별말 안해서 차 좀 막힌 수준인줄 알았더니...
    울언니도 고생했넹...ㅡㅜ

  3. 오르가논 2011.08.03 11: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생을 많이 하셨네요.
    이 글과 기사화된 글을 비교해서 보니 기사화되는 과정이 실감나게 다가오네요^^
    이번 폭우를 보면서 수해 피해가 한해 두해도 아닌데,
    왜 반복될 수 밖에 없는지 답답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졸리는 금요일 오후, 팀 회의 시간. “다음 주 ‘e-세상 속 이 세상’ 지면에는 어떤 글을 실을 것인가?”라는 중요한 주제로 회의를 하는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끄적끄적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자주 그리는 ‘표정 낙서’다. 이날은 나도 모르게 어딘가 모르게 야비해 보이지만 실실거리면서 웃고 있는 표정을 그렸다.



그런데 순간, 나는 나도 이 그림의 표정처럼 야비하면서도 실실거리며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혼자 민망해했다. 다행히 혼자 실실 웃고 있는 나를 아무도 못 본 모양이다. 휴.



이분이 페스팅거 교수.

커뮤니케이션 이론 가운데, ‘인지부조화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미국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가 제기한 이론이다. 인지부조화란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의견과 다른 의견을 갖게 되거나 자신에게 적절하지 않은 상황에 처할 때 느끼는 괴로운 심정, 그 불균형한 상태를 말한다.

페스팅거에 따르면 사람들은 인지부조화 상태로 인한 심리적 긴장감을 못견뎌 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실제 결과적으로 나타난 현상에 맞추면서 합리화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꽃미남이 이상형이던 여성이 짐승남과 사귀게 되면서 “사실 원래 내 이상형은 짐승남이었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경우가 있겠다.


명지대 김정운 교수도 얼마 전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 인지부조화 이론과 연결되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바로 ‘못 생겨도 웃는 여자가 살아남는 법’에 대한 지론이었다.

김 교수의 주장을 이해하기 전에 필요한 논리 구조를 보자.

사람의 뇌는 타인의 얼굴 근육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설계돼 있는데, 이 때문에 상대방의 얼굴 표정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따라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웃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 아무 이유없이 따라 웃게 된다. 그런데 웃다보면 ‘내가 기분이 좋지도 않는데 왜 웃는가?’란 인지부조화 상태에 직면하게 되고, 결국 ‘아, 난 기분이 좋아서 웃고 있는 거야’라고 스스로 합리화하게 된다는 거다.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 연구하시는 김정운 교수.ㅋ

이야기인즉슨, 예쁘지 않은 여자도 웃기만 한다면 상대 남성도 따라 웃게 되고, ‘내가 왜 웃고 있지’라며 인지부조화를 잠시 겪은 뒤에 ‘아, 난 이 여자와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가보다. 난 이 여자를 사랑하나보다’라고 결론내리게 된다는 거다.

꽤 일리있는 이야기다. 주위에서도 100% 애프터 신청을 받는 여성들을 보면, 꼭 빼어난 미인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항상 밝고 명랑한 성격에 ‘잘 웃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더라는 거다. 대신 아무리 스펙이 좋고 외모가 좋아도, 지나치게 도도하거나 상대방 말에 딱딱하게 대응하면 별로 실속을 차리지 못하는 경우를 여러번 보았다.

이는 꼭 남녀 관계 뿐만 아니라 유머코드에서도 통용된다. 개그맨 유재석씨가 이야기하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꼭 이야기가 끝나기 반박자 전에 혼자 피식 하고 웃는 걸 자주 보게 된다. 남들이 웃으면 나도 모르게 따라 웃게 되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유재석씨처럼 유머있는 사람이 인기가 높은 것을 보면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다.



그러니 행복하고 즐겁게 살고 싶으면 먼저 웃는 게 제일인 것 같다. 혼자 웃기 민망하면 나처럼 끄적끄적 ‘웃는 낙서’라도 하면서 따라 웃어보자. 때로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을지도 모르나,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할 것 같다.

사랑하는 친구 H야, 제발 너도 소개팅 나가서 좀 활짝활짝 웃어라.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말이 헛말이 아닌 것 같다.

'Life > interview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환일기를 아시나요  (4) 2012.05.01
폭우, 고난의 출근길  (4) 2011.07.27
웃으면 진짜 복이 올까?  (1) 2011.06.20
아버지와 노무현  (12) 2011.05.23
환상속의 그대, 서태지  (0) 2011.04.22
꿈찾아 떠난 꿈많은 녀석에게  (5) 2011.04.07
Posted by 이고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124anonymous 2011.09.28 20: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5월 23일. 오늘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신지 2주년이 되는 날이다. 벌써 2년이나 지났다니, 시간이 이렇게도 빠른가 싶다.

2년 전 오늘, 노 전 대통령이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을 때가 떠오른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그날은 지금의 남편(당시 남자친구)이 경기도의 한 도서관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자신의 ‘직업의 세계’에 대해 작은 강연을 하기로 했던 날이었다. 그래서 강연에 가서 사진도 찍어주고 하겠노라고 신나서 아침부터 수선을 떨며 일어났다.


봉하마을


그런데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던 뉴스가 망치처럼 내 머리통을 때렸다. 1보는 ‘노 전 대통령의 건강 이상설’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내용이었지만, 뉴스는 곧이어 ‘노 전 대통령 자살기도설’에서 ‘노 전 대통령 사망한 듯’으로 급진전했다.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노 전 대통령 사망’이라는 뉴스가 모든 매체를 뒤덮었다.

노 전 대통령은 내가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한 첫 정치인이자, 첫 대통령이다. 나는 노 전 대통령을 지지했고, 그가 대통령으로서 보여준 행보들과 탄핵 사태 등을 지켜보며 머리가 굵어졌다. 나는 그를 통해 사회를 보고 세상을 공부한 새파란 학생이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노 전 대통령


충격과 슬픔 속에 멍하니 TV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머리 속에는 언뜻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 강연보러 못 가겠구나. 출근해야겠네.’

아니나 다를까 선배로부터 여의도 한나라당사로 출근하라는 전화가 울렸다. 정치부에서 한나라당에 출입하던 때였다. 신문이 일요일날 나오지 않기 때문에 신문기자들에게 토요일은 무조건 휴일이다. 하지만 이날, 입사 후 최초로 ‘호외’라는 것을 만들었다. 나는 역대 대통령들이 노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취합하는 기사를 작성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내 몸의 반이 무너진 심정”이라며 통탄했다.

언론들은 노 전 대통령의 사망에 대한 각종 해설 기사들을 쏟아냈다. 대체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과 관련된 검찰 수사에 따라 받은 심리적 압박을 큰 이유로 꼽았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을 포괄적 뇌물 수수의 주체로 몰아가기 위한 압박을 더해갔고, 검찰 수사 내용은 언론을 타고 중계되듯 세상에 알려졌다. ‘도덕성’과 등치되던 노 전 대통령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으리라는 짐작을 한다.

2009년 5월 24일자 호외 경향신문


노 전 대통령은 우리에게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썼던 아름다운 대통령으로, 사람 냄새 나는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로, 아련한 추억이 되어 기억 속에 남았다. 하지만 그를 잃은 뒤 우리 사회는 많은 방황을 해야만 했다.

상대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실망과 분노는 더욱 커진 것 같다. 같은 박연차 사건 의혹에 휩싸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정치인은 재·보궐 선거에서 성공해 국회의원 배지도 달게 됐다. 노 전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던 진보 진영은 여전히 안개 속을 걷고 있다.


오늘은 노 전 대통령 뿐만 아니라 3년전 나의 아버지께서도 돌아가신 날이다. 아버지 제사는 음력으로 지내기 때문에 우연히 날이 겹친 것이긴 하지만, 왠지 오늘을 맞는 내 마음은 참 쓰다.

생전에 아버지와 나는 노 전 대통령 때문에 많이도 싸웠다. 보수적인 경상도 아저씨였던 아버지는 노 전 대통령에게 한 표를 던졌던 내게 늘 쓴소리를 하셨다. 나는 늘 아버지와 진보니 보수니 툭탁툭탁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기자가 된 뒤에는 당신의 딸을 참 자랑스러워 하셨고, 경향신문이 지향하는 바와 가치들에 대해 인정하고 이해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이제는 아버지도, 노 전 대통령도 곁에 없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두 어른 모두, 살아있는 자들의 그리운 인사를 듣고 계실 것이다. 가끔 저 세상에서 두분께서 우연히라도 마주치셨을지, 그렇다면 아버지는 노 전 대통령을 이해하고 계실지 궁금해진다. 모두 그립다.

'Life > interview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폭우, 고난의 출근길  (4) 2011.07.27
웃으면 진짜 복이 올까?  (1) 2011.06.20
아버지와 노무현  (12) 2011.05.23
환상속의 그대, 서태지  (0) 2011.04.22
꿈찾아 떠난 꿈많은 녀석에게  (5) 2011.04.07
‘배고픈’ 수습기자의 추억  (10) 2011.03.01
Posted by 이고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칼이씀아 2011.05.28 15: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원중 하나가 퇴임후의 대통령이 대통령되기 전의 직업인으로(보통사람으로)
    돌아 가는 모습을 보는거였는데...
    이분이 저의 소원을 들어주신 분입니다.
    쫓겨나거나 총맞아 죽거나 재판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던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남들은 권력을 놓는게 두려웠을텐데 이분은 무거운 짐이라 홀가분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어떤이가 자살이 아닌 순교라 합디다.
    잃어버린 10년을 되돌릴려는 명바긔의 의도를 무산시킬려고.
    자살 덕분에(?) 그를 알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그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보다 더 그를 알기위해 노력하고,
    그를 등졌던 사람들조차 그 죽음을 들여다 보면서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고 있다고.

  2. 2011.05.28 2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3. 주태백 2011.06.18 07: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아버님과 좋은 대통령을 가지셨든 당신은 인생의 좋은 자산을 가지셨습니다.
    항상 생각이 깊으시고 열정적인 당신의 모습을 사랑합니다.

  4. 이고은 2011.06.20 10: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과분한 칭찬에 부끄럽습니다. 벌써 이 글을 쓴지도 한달이 다 되어가네요. 시간 참 빠릅니다. 더운 여름인데 건강에 유의하세요.^^

  5. 국화향 2011.08.22 00: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정치를 잘 모르지만 큰별이 진 느낌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때 장례기간 때 조문은 다녀왔습니다 애들 데리고 다시 찾아뵙고 싶습니다

  6. 정경모 2011.08.26 14: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자가 이렇게감정이 한쪽으로지우쳐서야....

    꼭그렇게생각하지않는사람도있읍니다

  7. 가리비 2011.10.12 09: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때의 상황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네요. 잘봤습니다. 좋은 아버지를 두셨나보네요.

  8. 노무현 스스로가 만든 불행 2011.10.25 22: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고은기자님의 글을 종종 읽어오던 사람으로서 이기자님이 노무현을 추종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조금 당황스럽네요. 이런 성향의 사람들을 보면 일종의 철부지의 치기가 느껴집니다. 저는 다행히 아버지와 같은 의견과 성향을 가졌고 가족끼리의 대화에 있어서 정치적이거나 시사적인 문제로 한번도 언성을 높이거나 마찰을 빚은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들과 이런 문제로 의견대립이 없어 너무 좋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다른 친구들의 경우와 비교해서 말이죠. 이기자님의 아버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네요. 진보성향의 딸의 철없는 말에 얼마나 속이 타셨을지...지금 생각해보면 부모자식지간에 이런 의견차이로 인한 생각의 골이 없다는 것은 큰 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외신들이 말하는 한국 대통령 역사상 가장 불행하다고 한 진정한 의미를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 사는 세상을 천명했지만 결국 사람 살기 힘든 세상을 만들었고 사람 냄새나는 사람처럼 보이고자 했지만 결국 위선자의 악취를 세상에 퍼트리고 이 세상을 포기했습니다. 이처럼 무모하고 자격미달의 사람이 이처럼 우상시되고 신성시되는 경우는 한국 역사상 아니 세계 역사를 보더라도 보기 드문 경우일 겁니다. 밖에서 보는 노무현에 대한 정확하고 매서운 평가를 정작 안에서는 아직도 이성을 마비시키는 노무현이라는 지독한 최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로 인해 희석되고 평가절하된다는 것이 안타까울뿐입니다.

    • 경사 2012.04.09 17: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신 불행하다는 의미나 아쇼?
      현 누구처럼 거짓말에, 장병들이 죽어가고있는데,불구경하는 사람은 좋은 세상을 만들고 있는 중이겠네요?
      당신 알바요???
      진정으로 당신이 바른말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국가 세금을 제 멋대로 유용하고, 재산 환수도 않는 파렴치한 전 대통령이나 뜯어보쇼? 썩은 알바씨!!!

  9. 어쩌피대통령감은안보여 2012.01.14 06: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무현 대통령을 추억하는건 개인 감정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성향 따지는 것보다는 현 실태의 문제점을 꼬집어서 없애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야할텐데... 그리고 2011/10/25 노무현 스스로가 만든 불행 이라는 분 성향에는 나이 성별 아무런 관계도 없을 뿐더러 정신의 성숙함을 따지는 의미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이 나라를 갈등하고 대립하게 만들어 가는것 뿐이지요. 무조건적 험담은 지식을 갖추었다는 사람이 가져서는 안될 글입니다.

친한 친구들끼리 늘 사총사로 몰려다니던 고등학생 시절, 우리의 가장 큰 일탈은 한달에 한번 있는 수능 모의고사가 끝난 후 이뤄졌다. 일탈이래봐야 우리가 한 일은 고작 4명이서 하루 300원씩 모은 4만원 정도로 ‘돼지갈비’를 사먹고 나머지 돈으로 노래방에 갔던 것 뿐이다. 하지만 당시 학생들에겐 노래방 출입이 금지돼있었기에, 암암리에 노래방에 드나드는 것은 우리의 큰 기쁨이었다.

우리 중 한 친구는 가수 양파의 노래를 기가 막히게 잘 불렀다. 양파는 R&B풍의 ‘애송이의 사랑’이란 노래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한번쯤 이 노래를 따라해보지 않은 여고생은 없을 것이다. 친구의 양파 모창이 끝나면 나는 이승환이나 패닉, 토이의 노래를 불렀다. 아이돌의 ‘조상’이라 불리는 HOT나 젝스키스의 인기도 엄청났었지만, 나의 취향은 그쪽이 아니었다.

그런데 양파든 이승환이든 HOT든 모든 가수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를 대동단결하게 하는 가수가 있었으니, 바로 서태지였다.


누군가가 서태지의 노래 한곡을 부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노래방 아줌마가 몇번이고 서비스 시간을 넣어줘도 우리는 끝까지 서태지의 노래로만 레퍼토리를 이어갔다.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지 우리는 ‘난 알아요’ ‘환상 속의 그대’ ‘교실 이데아’ ‘하여가’ ‘컴백홈’ 등 여하간 무지 쎈 노래들을 쉬지도 않고 열심히도 불렀다. 그러다 흥분이 가시면 ‘너와 함께 한 시간 속에서’ ‘이 밤이 깊어가지만’ ‘너에게’ ‘널 지우려해’ 등 아름답고 차분한 발라드 곡도 잇달아 불렀다. 불러도 불러도 화수분처럼 나오는 레퍼토리와 그 모든 곡을 공유하며 함께 부르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우리는 우정을 나눴다.

아마도 90년대에 10대를 보낸 많은 이들은 서태지의 노래를 통해 자신의 감성과 자아, 혹은 우정까지도 확인했을 것이다. 감성이 가장 풍부한 10대에 즐겨듣는 음악은 사람의 감성을 평생 지배하는 자양분이 되는 법이다. 특히 그의 노래가 기존의 틀과 상식을 깨는 파격적인 면모가 있었던만큼, 우리 세대가 기존 세대와는 비교하기 힘든 독특한 자아를 형성하는 데 그의 역할이 상당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때는 서태지가 결혼도 하지 않고 사생활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며 ‘오로지 음악’만을 생각하며 천재적인 예술혼을 빛내는 것이 멋지게 느껴졌다. 지금은 보편화됐지만 그가 처음으로 시도한 앨범 준비를 위해 휴식기를 갖는 것이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할 때 돌연 은퇴를 선언하는 것도 너무 충격적이면서 쿨하게 느껴졌다. 이 세상 사람같지 않은 신비로운 면모가 그를 더욱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런 서태지가 데뷔 후 약 20년만에 엄청난 스캔들로 대중들 앞에 섰다. 과거의 행적이 전혀 밝혀지지 않아 ‘외계인설’까지 떠돌았던 배우 이지아와 결혼을 했었고, 이혼 소송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전혀 교집합이 없던 두 사람의 스캔들이라 더욱 충격이 크다.

서태지에 열광했던 사람들이라면 그가 ‘결혼’ ‘이혼’ ‘위자료’ 등 매우 현실적인 단어들과 결부돼 거론되는 것 자체가 참 낯설 것이다. 그의 존재 자체가 ‘환상’이었기 때문이다.

요즘에야 스타의 결혼 자체가 상품화되어 대중들에게 선보이지, 과거의 분위기는 결코 그렇지 못했다. 과도한 신비주의라는 비판도 나올 수 있겠지만 당시 서태지의 영향력을 생각해보면 결혼 사실을 알리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어떤 면에선 오히려 비밀로라도 결혼을 했다는 것 자체가 더욱 로맨틱해보이는 면도 있다.

“세상은 분명히 변하겠지. 우리의 생각들도 달라지겠지. 생각해봐. 어려운 일 뿐이지.”

서태지의 노래 ‘너에게’의 한 구절이다. 당시엔 참 아름답고 환상적인 노래라 생각했는데, 이제 다시보니 한 인간이자 한 남자의 현실적인 고민들이 녹아있는 노래다.

내가 이제 감성으로 가득찬 10대가 아닌 현실적인 30대가 되어서 그런지 지금은 그들이 조금 측은해진다. 사생활을 철저히 숨겨야 했던 서태지나 슈퍼 스타의 이름없는 아내로 살아가야 했던 이지아의 말 못할 고통이 나와 같은 대중들의 환상을 채워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어쩌면 지금도 대중은 그들에게 환상을 강요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Life > interview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웃으면 진짜 복이 올까?  (1) 2011.06.20
아버지와 노무현  (12) 2011.05.23
환상속의 그대, 서태지  (0) 2011.04.22
꿈찾아 떠난 꿈많은 녀석에게  (5) 2011.04.07
‘배고픈’ 수습기자의 추억  (10) 2011.03.01
공포 영화가 따로 필요없는 사회  (4) 2011.02.24
Posted by 이고은

댓글을 달아 주세요

지난 일요일에 초등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 녀석이 ‘이민’을 결심하고 유럽의 어느 나라로 떠났다. 한국에 그 나라 말로 된 책은 단 2권밖에 없고, 그나마도 지금은 구할 수도 없을 정도로 생소한 나라다. 녀석은 어릴 때부터 늘 ‘언젠가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고, 결국 서른을 넘긴 나이에 안정된 직장과 한국에서의 삶을 훌훌 털어버리고 홀연히 떠나버렸다.

2년 전엔가, 녀석은 처음으로 말했다.

“고등학교 때부터였나. 한국이 아닌 곳에서 살아보고 싶었어. 여기서 직장을 갖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가족을 꾸리는 평범한 삶도 좋은 일이지만, 한 번 뿐인 인생인데 모든 것이 정해져있는 삶을 산다는 게 왠지 좀 답답하게 느껴졌거든. 언젠가는 몽골에서 수염을 기른 채 낙타를 타고, 또 언젠가는 엄청 추운 겨울 나라에 가서도 살아볼 거야. 적어도 ‘지구’에서 사는 이상, 최대한 지구의 많은 땅 위에서 살아보고 싶어.”


나는 곧바로 비판을 해댔다.

“니가 아직 현실의 냉혹함을 몰라서 그러는 거 같은데, 그런 평범한 삶을 제대로 살아내는 것만도 대단한 거야. 사람들 삶이 평범해보이지? 하지만 그런 삶을 만들어가는 데도 얼마나 큰 노력과 에너지가 드는 줄 알아? 사회 생활 더 해봐라.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될 거다.”

나의 꼰대같은 이 발언에 녀석은 좀 빈정이 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곤 곧 있다 연애를 시작했고, 애인과의 사랑이 익어갈수록 애초의 생각을 털고 ‘결혼’과 평범한 행복을 꿈꾸어가는 듯했다. 나는 속으로 ‘거봐, 내 말이 맞지?’라고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했고, 녀석이 정말로 떠나버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나, 나는 2년 전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녀석과 인천공항에서 마주했다.

“이렇게 한번 떠나지 않으면 죽을 때 후회할 것 같아서 결국 떠나기로 했어. 한번 사는 인생인데 후회하고 살기 싫더라고. 휴가 때 놀러와라. 한국 돌아오면 또 보자.”


결국 자신의 꿈 대로 현실의 안락함을 버리고 떠나는 녀석 앞에 나는 2년 전처럼 비판을 해댈 수 없었다. 처음 녀석의 말을 들었을 때 무작정 비판부터 해댔던 것은 사실, 녀석에 대한 걱정이나 녀석이 그리는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녀석처럼 모든 것을 훌훌 벗어던지고 ‘자유’를 찾아 떠나는 삶을 나는 살아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팩트’에 목을 매야 하고, 현실의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기자로 살아가느라 녀석처럼 인간 이고은의 ‘꿈’이란 것에 대해 곱씹어볼 여유가 없었던 이유도 있다.

녀석은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심사를 한 뒤엔 딸랑 이틀을 예약해둔 숙소에 짐을 풀고, 은행계좌를 트고, 그 나라 말을 배우러 가겠다고 했다. “막상 떠나려고 보니 이게 또 현실이네”라며 약간의 두려움과 설렘을 비치던 녀석은, 이내 “떠나지 못했다면 영영 꿈으로만 남았겠지”라며 웃었다. 그 불확실성에 나는 또 나도 모르게 “가서 책을 써봐”라며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을 건넸다.

꿈은 그 꿈을 좇을 때까지만 꿈이고 막상 그 꿈을 이루거나 가까이 가면 바로 현실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꿈을 좇아가는 그 순간들만큼은 무엇보다도 찬란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은 저만치 멀리 두고, 내내 그리워하며 바라보기만 한다. 꿈을 현실로 이뤄가는 사람은 생의 매 순간순간이 찬란하고 행복할 것이다.

녀석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친구, 멋진 지.구.인이 되어라!

파이팅!


Posted by 이고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칼이씀아 2011.04.10 19: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다 떨리고 설레는군요.
    떠나는 그 용기...
    후회하는 삶을 사는거 보다 지금 하고 싶은대로 하고 싶은것을
    하고 사는 그 친구분이 부럽습니다~^^

  2. 박혁 2011.04.11 09: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주온다 해놓고 너무 못왔죠,ㅎㅎ까먹었어요^ㅡ^/
    그분께선 떠난게 아니라 단지 다른곳에 서있는게 아닐까요.ㅎㅎ지구위 어디를 가시든 그곳에 서 계시다면
    그곳이 그분의 땅이겠죠 최고의 삶 너무 멋져보입니다
    나도 떠나버릴까ㅠ0ㅠㅋ

  3. 파랑새 2011.04.12 22: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누구인지 참 사는거 같이 산다는 생각^^
    그 용기가 왜 그리 내기 힘든건지.
    마음은 그런데 몸이 겁나!!

지난 주에 수습 기자 후배들과 기수 회식을 했다. 이번 수습 기수는 48기. 내가 44기이니까 벌써 내 밑으로 4개 기수의 후배들이 생겼다. 우리 회사가 수습 기자를 뽑지 않은 해도 있었는데, 어쨌건 나도 벌써 입사 6년차 기자가 됐다. 꽃같은 20대를 기자로 살다가 정신차려보니 이미 30대가 되어 있다. 시간 참 빠르다.

경향신문 수습기자 시험을 보는 수험생들


48기 후배 중에 눈에 띄는 후배가 있었는데, 가장 나이 어린 여기자 후배였다. 기수 가운데 술을 가장 못 마신다는, 발가락 양말을 신은 이 예쁘장한 후배는 술자리 내내 ‘안주빨’을 세우며 꾸준히, 끝도 없이, 주구장창 안주를 먹어댔다. 동기들은 뭐든 잘 먹는 그 후배 앞에다 계속 먹을 것을 놓아주며 “많이 먹어라” “수습 때는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다”며 다독였다. 후배 먹는 것만 봐도 뿌듯한, ‘엄마 미소’를 뿜어내고 있는 동기들을 보니 ‘아, 우리도 늙었구나’ 싶은 마음이 들어 괜히 서글퍼지기도 했다.



그 후배를 보니 나의 수습 시절이 떠오른다.

나도 체질적으로 술을 잘 못 마시는 편이다. 술이 한잔만 들어가도 얼굴이 빠알갛게 달아오르고, 조금 더 들어가면 온 몸이 빨간 고무다라이처럼 붉어진다. 그런 내게 입사 후 내리 먹어야 하는 폭탄주는 정말 고역이었다.

때문에 내가 택한 방법도 ‘안주빨’을 세우는 것이었다. 술이 들어가는만큼 안주로 배를 채워줘야 그 술을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폭탄주를 먹고난 뒤면 아무리 배가 부른대도 하얀 쌀밥에 된장찌개를 꼭꼭 챙겨먹었다. 그러다 용량 초과로 ‘토하고 또 먹고’를 무한 반복하는 동물적인 생활을 이어가야 했지만.

폭탄주 '제조' 장면


때론 반찬부터 한 가득 나오고 밥은 나중에 나오는 한정식 집에서 회식이 잡힐 때면 속이 상하기도 했다. 그래서 눈치를 살짝 살짝 보다가 서빙하는 종업원에게 ‘밥 한 공기만…’이라고 속삭이다 선배들에게 걸려서 눈총을 받은 적도 있다.

하루는 우리 사건팀이 잘 가는 삼겹살 집이 있었는데 그집 이름이 ‘서울 곰탕’이었다. 하지만 우린 회식 때마다 삼겹살을 시켜먹었기 때문에, 이름만 곰탕이지 사실상 그곳이 곰탕집이라고 인식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창 회식이 이어지고, 밀어닥치는 삼겹살과 폭탄주에 헤롱헤롱해진 나는 ‘밥을 먹어야 할 때’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고, 다들 밥을 시키는 타이밍에 나는 자신있게 “곰탕주세요!”라고 외쳤다.

그러자 모든 시선이 내게로 모아졌다. “서울곰탕에서 곰탕 먹는 애는 너밖에 못 봤다”는 야유와 함께.



물론 나의 식탐을 ‘위장 보호를 위한 안주빨’이라고만 주장하기에 사뭇 양심에 찔리는 수습 시절의 일화도 있다. 지금은 당시를 되돌아보면 지성인으로서 품위를 저버린 그 행동을 어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싶다. 모두 남들이 뭐라건 물불 안가리는 수습 기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리라.

때는 2005년 12월 31일. 유일하게 수습 ‘사스마와리’(경찰서 돌며 취재하기)가 없던 토요일이었는데, 하필이면 전날 1진 선배가 호출해 새벽까지 잠을 못자고 마와리를 돌아야 했다. 밤을 꼴딱 샌 나는 토요일 하루 온종일 자다가 오후 5시쯤 일어나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밥을 먹으러 나갔다.

머릿속에 오로지 ‘아, 고기가 먹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찼던 난 과년한 처자의 몸으로 홀로 갈비집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씩씩하게 “돼지갈비 2인분 주세요”라고 외치고 열심히 돼지갈비를 구워먹었다.

혼자 먹어도 맛있습니다!

개인적으론 식당에서 혼자 밥 먹는 걸 어색해하는 우리 사회가 좀 이상하다고 보고 지금도 혼자 밥을 먹어야 할 때 당당히 식당 문을 두드리긴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혼자 갈비를 구워먹은 것은 좀 심했다고 반성한다. “쏘주 한병이요”라고 외치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지만…. (그래도 시집은 갔으니 다행이다.)



수습 기자 시절은 모든 기자들에게 추억의 한 때지만, 결코 돌아가라면 절대 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다. 추억은 난무하나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애증’의 시간이라고나 할까. 과도한 스트레스와 수면 부족, 비인간적인 생활 등등으로 인해 나처럼 ‘동물’적인 식탐으로 비화하는 사례가 있듯이 말이다.

오랫만에 또다시 밥을 꾸역꾸역 챙겨먹은 채 폭탄주를 과도하게 마셨더니, 헤롱헤롱 취했다. 들큰하니 취한 상태로 후배 수습기자를 택시에 태워 경찰서로 실어다주는 기분이 왠지 모르게 뭉클하기만 하다. 같은 꿈을 꾸고 같은 길을 걷겠다고 나선 후배가 이뻐보이기도 한다. 거의 ‘생활인’이 되어, 묻어뒀던 꿈을 다시 살짝 들춰보게 된 데서 오는 흐뭇함인가. 아, 나도 꼰대가 되어가나보다.

그런데 추억이랍시고 쓰고보니 나의 인간적 품위가 너무 떨어지는 것 같다. 없어보여도 너무 없어보인다. 혹시 기자를 꿈꾸는 미래의 후배님들이 이 글을 보신다면 재고하시기 바란다. 남자분들은 군대 한번 더 간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히히.





 

Posted by 이고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칼이씀아 2011.03.01 12: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혼자 식당은 잘 가는데 아직 고기집엔 안가본 사람으로서
    박수를 보냅니다. 다 읽지는 못했지만 글들과 댓글들을
    보면서 님의 개념이 참으로 좋습니다~^^

    • 이고은 2011.03.02 12:27  댓글주소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혼자서 갈비 구워먹기 언제 한번 시도해보세요. 왠지 앞으로 무슨 일이든지 할수 있을 것 같으실 거예요. ㅎㅎ

  2. 매실짱아찌 2011.03.01 17: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아보이시던 이기자님에게도 이런 과거가 있으셨군요.^^

    • 이고은 2011.03.02 12:30  댓글주소  수정/삭제

      호호. 저 이런 여자였답니다.
      그나저나 매실장아찌님 요새도 쇼핑카트 잘 뒤집고 계신가요? 전 요즘 많이 무너지고 있어요. ㅠㅠ 이러면 안 되는데!!!

  3. 명일 2011.03.02 13: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파란색 문장에서 10초간 눈을 못 떼고 있었습니다.
    서초경찰서에 있던 그 겹겹이 때묻은 이불은 이제 바뀌었다던데…

    • 이고은 2011.03.02 14: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군대 운운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
      명일씨도 수습 시절의 추억을 한번 되새겨봐. 다만 나에 대한 기억은 잊어줘...ㅋ

  4. 신데레사 2011.03.02 19: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혼자서 돼지갈비집, 좋아요!!!
    왜우리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걸로 가끔씩 얘기하는지
    전 이해가 조금 안된답니다
    휴일이나 평일에나 가까운 산행에도 둘씩셋씩 짝지어서
    끊임없이 말을 주고받으며 걷고 시장은 물론이고 운동등
    무리무리 몰려다니는 것이 꼭 인간성 좋다고 하는지,
    모르겠요

    저는 아마도 이기자님 어머님연배쯤 될것같습니다마는
    씩씩하게 혼자서 못하는것이없습니다
    식사는 말할것도없고 쇼핑은 필히 혼자합니다
    친구랑같이가면 공연이 미안할때도 있고,
    한번은 삼계탕이 먹고싶어 혼자가서 시켜먹고 나오고
    별식죽집도 혼자가고
    그렇다고 친구없는거절대 아닙니다
    친구들이랑 함께 할때가 훨많지만 혼자서도 당당하게
    무엇이든 할수있는 습관도 때론 필요하다는걸 말씀드렸어요

    이름이 차암 이쁘고 미음 결이 실크처럼 고울것같은 선입감이듭니다
    혹시 부모님께서 그런의미에서 지으신것이 아닌지요,
    좋은글 잘읽습니다~~

    • 이고은 2011.03.02 2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의 부모님께서는 제 이름을 지으실 때, 태어나고 보니 너무 못생겨서 좀 '고와'지라고 이렇게 지었다고 말씀하시곤 하는데... 감사합니다.ㅋ
      신데레사님도 씩씩하시군요! 파이팅입니다. 블로그 자주 놀러오세요.^^

처음부터 공포 영화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세상이 마냥 꽃밭처럼 화사해 보였던 20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피가 튀고 살이 잘리는 폭력물조차도 보기 싫어했던 나다. 전쟁 장면을 실감나게 그려낸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던 도중, 영화관에서 뛰쳐나와 화장실로 뛰어갔던 전력도 있다.

그런데 2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언젠가부터 공포 영화의 ‘마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돈 주고 왜 고문을 당하느냐”며 공포 영화를 거부했던 나였지만, 어느새 이름난 공포 영화가 개봉하면 찾아가서 보는 일종의 ‘마니아’가 되어버렸다.



왜일까?

바로 공포 영화가 주는 카타르시스 때문이다. 극도의 긴장감으로 관객을 몰아간 뒤 그것을 일거에 해소하는 공포 영화의 영화적 기법은 보는 이에게 상당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공포 영화를 무조건 싫어하는 이유는 이 극도의 긴장감 때문인데, 긴장 뒤에 뒤따르는 이완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이런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고 난 뒤의 기분은 뭐랄까, 상당히 스릴있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난 기분이랄까. (아…, 나는야 변태 매저키스트?)


당시 재미있게 본 공포 영화로는 동굴 속에 갇혀 미지의 괴물로부터 공격받는 <디센트(descent)>, 흡혈귀와 30일간의 사투를 그린 <써티 데이즈 오브 나잇(30 days of night)>을 추천하겠다. 보다 보면 숨이 멎는 듯한 공포를 꾸준하게 맛볼 수 있다. 단, 둘 다 속편은 절대 보지 말길 권한다.

그중 특히 좀비 영화에 빠진 적도 있다. 좀 잔인하지만 코믹한 요소도 있는 <새벽의 황당한 저주>, 28일이란 시간 동안 온 세상이 좀비 투성으로 변하는 <28일후>는 수작이라 생각한다. 나를 제외한 세상 모든 이가 인간의 모습을 한 좀비가 되어가는 상황은 그 자체로도 얼마나 공포스러운가. 무조건 베고 죽이는 피 튀기는 공포물보다 심연의 공포를 끌어내는 것이 더 무서운 법이다.

좀비 영화의 마력은 세기말적 분위기에 있다. 엄연히 말해 좀비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에도 묘한 매력이 있는데 영화 전반에 흐르는 세기말적 분위기 때문이다. 이건 일종의 재난 영화로도 볼 수 있겠는데, 알 수 없는 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사람의 눈이 멀어버리면서 망가져가는 인간 사회를 그렸다. 혹시 볼 생각이 있다면, 주제 사라마구의 원작 소설을 먼저 읽기 권한다.

영화 사진 출처 : 모두 네이버 영화




그런데 최근 들어서 공포 영화에 대한 나의 흥미는 급격하게 떨어졌다.

공포 영화에 열광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일종의 ‘도피 심리’에도 있다. 현실이 잔인하고 무서울 때, 현실보다 더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가상의 세계로 들어가면 현실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 그리고 나서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지금의 현실이 영화를 보기 전보다 좀 나아 보이는 착시 현상도 경험할 수 있다. ‘세상이 아직 살 만하다’는 착각 혹은 안도를 주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나는 현실이 공포 영화만큼이나 충분히 끔찍하고 공포스럽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며칠 전 트위터를 통해 떠돈 한 사진이다.

출처 : http://yfrog.com/h6d7sp

@Photomaker79라는 트위터리안이 올린 사진인데, 경기도 연천군의 실제 현장 사진이다. 구제역 때문에 매몰한 돼지 사체가 노출되자, 그 사체를 뜯어먹겠다고 달려든 독수리떼 사진이다. 이걸 보고 많은 이들이 ‘세기말’적이라며 수많은 RT를 눌렀다. 이 장면보다 더 공포스러운 영화가 있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무서운 사실은 더 있다. 구제역 매몰 사체에서 발생하는 침출수가 지하수로 흘러들어 구제역 발생 지역의 물은 거의 ‘죽은 물’이나 다름 없어졌다. 죽은 물, 죽은 땅…. 완전히 복원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르니, 그 사이에 물 때문에 알 수 없는 전염병이라도 생기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봄이 되면 알 수 없는 기괴한 병이 창궐할지 모를 일이다.

[여적]흉가(凶家) 2011.2.17 경향신문

 
살아있는 생명을 무참히 땅에 파묻었으니, 이들의 원혼이 구천을 헤매고 떠돌아다닐 수도 있다. 소, 돼지의 형상을 한 귀신들이 ‘내 억울한 사연을 들어보시오’ 하고 고속도로에 뛰어드는 장면을 보았다거나, 어느 시골 지하 공간에 갔더니 피 흘리는 돼지 귀신이 다가오더라는 목격담이 조만간 들려올 지도 모르겠다.

이런 일들이야 말로 돈 주고도 볼 수 없는 초절정 그로테스크 호러물이 될 것이다. 영화보다 더 공포스러운 현실이 버젓이 기다리고 있는데, 뭐하러 돈 주고 공포 영화를 보러 가겠는가. 벌써부터 으슬으슬해진다.


2011년 2월 23일, 잔인하고 공포스러운 동영상이 공개됐다. 구제역 살처분 현장의 모습이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도 끔찍하고 고통스럽지만, 불편한 진실에 직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다.

동영상 보러가기 : [현장에서]살처분 7분 영상에 눈물·분노… “아우슈비츠가 따로 없네요”

 

Posted by 이고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파랑새 2011.02.26 11: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일을 어찌해야 할지...
    눈물이 나서 도저히 볼수가 없네요.

  2. 세진아빠 2011.03.08 2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중학교때 전학온 친구가 도시락 먹을때 고기나 햄은 전혀 먹지 않더라고..이유인즉, 어렸을 때 시골에서 죽은 새끼돼지 사체를 밟았데..그게 너무 공포스러워서 고기는 절대 못 먹겠다고 하더라...저 사진과 구덩이에서 울부짖는 돼지를 보니 갑자기 그 친구 생각이 나더라..고기먹기도 무서워진다..

    • 이고은 2011.03.09 15: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맞아. 나도 돼지들 울음소리를 듣고선 한동안 귓가에 울려퍼졌었는데...(이내 돼지수육 만들기 레시피를 블로그에 올리는 나는 뭐냐;;;)

기자들은 ‘물 먹는 것’을 무지하게 싫어한다. 언론계에서 물을 먹는다는 건 다른 기자가 특종한 기사를 놓쳐서 ‘낙종’을 한다는 의미다. 독자들 입장에서야 고만고만한 뉴스가 어느 신문에 하루 먼저 나오는지 별로 의미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기자로서는 물을 먹는다는 건 자존심이 이만저만 구겨지는 일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도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편은 아니다. 고양이가 물을 핥아먹는 수준으로 홀짝이는 스타일이다. 물 종류를 벌컥벌컥 마시는 경우는 폭탄주를 원샷해야 하는 경우 외엔 별로 없다.

그런 내가 물을 아주 열심히, 벌컥벌컥 무지하게 마셔댔던 때가 있었으니 바로 신혼여행 때다. 대망의 신혼여행지는 태평양의 섬 나라, 피지(fiji). 두둥.


평소 헐리우드 패셔니스타들이 ‘피지워터(fiji water)’를 즐겨마신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있던 나는, 참 없어보이게도 이 참에 한국에선 비싸서 차마 마셔볼 엄두도 못냈던 이 물을 후회없이 마셔보겠노라고 다짐했다. “값쌀 때 많이 먹어두자”는 소외된 이웃 근성은 어쩔 수가 없나보다.(맛은 그저 그랬다.)


그렇게 신나게 마셔댔던 피지워터의 가격이 한국에서 기름값보다 비쌀 정도로 높다는 보도가 나왔다. 또 그 수입량이 급증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ℓ당 1.31달러에 수입되는 피지워터는 ℓ당 0.50달러에 수입되는 원유 평균수입가격의 두배는 거뜬히 넘는다. 이보다 더 비싼 물도 여럿 있다. 노르웨이산 생수의 ℓ당 수입가격은 2.26달러, 이탈리아 생수는 1.48달러, 미국 1.32달러에 달한다. 백화점에서 팔리는 노르웨이산 생수는 800㎖ 한 병에 1만원에 팔린다고 한다.

이런 비싼 물이 국내에서 인기를 얻는 것은 해양심층수나 빙하수 등 주로 퍼내기 힘든 지역 위주로 퍼모은 물들을 원료로 한 ‘프리미엄 생수’ 시장이 급격히 확대되고 있는 결과라고 한다. 끊임없이 치솟는 유가에 혀가 내둘러지는 이 때에 기름보다 비싼 물이 인기라니 의아하긴 하다.


자본주의가 심화될수록 식량 소비수준의 빈부격차는 더욱 커진다. 폴 로버츠는 <식량의 종말>에서 “가난한 동네는 부자 동네나 백인 동네보다 패스트푸드점과 편의점이 많고 (신선한 농산물과 건강에 좋은 물품이 모여 있는) 식료품점이 드물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소득 수준에 따라 먹는 음식은 물론 마시는 물도 다른 것이 현실이다. 있는 사람은 먹는 물만으로도 자신의 가격을 매기는 세상이다.

각종 생수들


하긴 그러고보니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 몇년 전 서울 강남에 위치한 모 백화점에서 최초로 문을 연 ‘워터 바’를 오픈 1년 후 취재하려고 현장을 방문하겠다 했더니, 백화점 측에서 거부했다. 보통 유통업체는 언론사에서 취재하겠다고 하면 홍보 효과 때문에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 경우는 무척 단호했다.

이유인즉슨, “고객들이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고객들이 뭘 싫어한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분위기 좋은 워터바에서 기름값보다 비싼 생수로 지체높은 몸을 정화시키고자 하는 값비싼 고객들이 찾는 곳이니, 굳이 언론 홍보 효과가 필요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기름값보다 비싼 물이 국내에서 이렇게 인기라는 것을 보면, 이렇듯 ‘노는 물이 다른’ 사회지도층들이 꽤 많긴 많은가 보다.

Posted by 이고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저녁노을 2011.01.27 2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회지도층...맞네요.ㅎㅎ

    잘 보고가요

  2. MadMax 2011.01.28 07: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봉이 김선달 저리가라군요..

  3. 딸기 2011.01.28 09: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다. 그리고 씁쓸하다.
    아프리카에 우물 하나만 파줘도 몇 마을에 질병이 줄어들고 여성들, 아이들 노동이 줄어드는데
    어디에선 '피지워터'에 '워터바'에... 세상 참 거시기하네.

    • 이고은 2011.01.28 11: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게 말입니다. 이젠 먹고 마시는 것까지 '패션'이 된 시대이니, 가진 자들은 더욱 더 이를 통해 자아확인을 해나가겠지요.

  4. 2011.01.28 12: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한심해요...한국사람들은 돈없어도 명품백매거나 비싼 명품물 먹으면 자기가 무슨 사회지도층이라도 된줄 착각을 하죠...그런 마음에서 비롯되는게 아닌가싶네요...
    전 미국에 사는데 여기서는 fiji물보다 arrowhead라고 그 물 24개짜리 500ml 3.69불이면 사먹네요...
    연예인들도 이 물 많이 사먹고...미국celeb은 한국연예인보다도 몇백억 버는거 아시죠? 그래도 filtered water먹거나 그러는데...
    참 여기 미국 뉴스에서 fiji물 앞으로 안 나올꺼라고 하던데...섬 환경 지키려고...
    암튼 perio도 여긴 1불이면 사먹는데 한국에선 뭐 8천원인가 1만원인가 하더군요...한국은 역시 비싸야만 잘팔리고 사먹나봐요...머리에 다 떵들만 찼는지....

    • 이고은 2011.01.28 15:40  댓글주소  수정/삭제

      구구절절 옳으신 말씀입니다. 비싼 물병을 들고 다니면 마치 자신의 몸값이 올라간 듯 착각하는 사람들, 참 이상하지요?

  5. 유인경 2011.01.28 16: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본주의사회에서 자기 돈으로 얼마짜리 물을 마시건 자유겠죠.
    그런데 그 물이 정말정말 그 사람들을 명품으로 만들어줄까요?
    그 물 마시나 우리집 수돗물 마시나 소변으로 배출되는건 마찬가진데...
    혹시 그 사람들, 자기 오줌도 명품이라고 자랑하는건 아닐지... 쩝...

  6. likiss 2011.02.10 1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검약은 미덕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사회에서 부자들의 과소비를 부도덕하다고 비난해야만 할까? 그렇게 말하면 으례 그돈이 누구로부터 착취한 거라든가 탈세, 특혜 등으로 축적한 부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물론 우리사회 부자들이 부도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부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꼭 그런 이유때문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무리 정당하게 벌어도 과소비하면 그 돈으로 아프리카 빈민을 도울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미국에서 부자가 마당에 사자를 키워도 그런 비난은 않는다. 대체로 평등사상(?)이 특히 강한 민족같다.

  7. likiss 2011.02.10 1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대학다날 때 성북동에 큰집이 빼곡이 들어선 동네를 "도둑촌"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부의 축적이 부도덕하다는 이유에서 비롯된 말이다. 나는 그렇게 교육받으며 자랐다. 우리나라에는 과거 선비의 청빈을 존경한 전통이 있었고, 자수성가하여 엄청난 부자가 된 사람을 존경한 예가 없다. 부의 축적에는 필수적으로 부정한 방법이 사용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라고 본다. 부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이 우리 안에 있고, 노력하여 부를 축적하는 것을 그냥 부러워하거나 더 나아가 존경하기보다는 시기와 질투의 관념이 앞서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