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를 취재하던 것도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16일자 우리 신문에서 쓴 박 전 대표 관련 기사를 보니,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큰 변화는 없는 것 같다. 박 전 대표의 뚝심이랄까, 고집이랄까… 원칙을 중시하는 성격도 여전한가보다.
점차 2012년 대선을 준비하는 열기는 서서히 데워지고 있는 것 같고, 생각난 김에 내 기억 속의 박 전 대표를 조금 꺼내서 끄적여본다. 오래 전 이야기이고, 부담없이 전할만한 가벼운 이야기들만 옮긴다.
나는 2007년 8월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막바지에 정당팀 막내로 발령받아 갔었는데, 그때는 이명박 당시 후보의 ‘BBK 사건’ 및 ‘도곡동땅 의혹’, 박근혜 후보의 ‘최태민 파문’ 등 온갖 흑색선전이 난무하던 때였다. 정치의 ‘ㅈ’자도 모르던 순진무구한 나는 전쟁터 한 가운데에 떨어져 모든 게 신기하고 새롭기만 했다.
2007년 8월. 경선에 임박해서는 이런 식의 구도로 찍은 사진들이 언론에 많이 등장했다. 경향신문DB
당시 한나라당 반장이었던 선배는 무척 세심하고 배려심 깊은 분이었는데, 그 전쟁통 와중에 막내 기자를 데리고 다니며 한나라당 인사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시켜줬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고마운 일이다. 여하튼 그땐 때가 때인지라 하루에 100장 이상의 명함을 주고받았던 것 같다. 덕분에 내 정신은 거의 출장나간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 와중에 박 전 대표를 처음 만난 순간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국회 의원회관에서 행사가 있었는데, 행사에 참석한 박 전 대표가 중간에 빠져나갈 때 따라나가 그가 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겨우 눈도장을 찍었다. 처음엔 박 전 대표의 수행비서인 안봉근 열사(출입기자들만의 별명이다)가 강력히 저지했으나, 반장 선배 특유의 친화력으로 겨우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수 있었다. 물론 지하 1층에서 지상 1층으로 올라가는 짧은 시간 동안에 겨우 인사만 하는 데 그치긴 했지만….
당시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란 생각에 어안이벙벙했는데, 한창 경선 막바지였던 당시 분위기상 박 전 대표와 함께 같은 엘리베이터를 탄 것만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됐다. 최근에도 한 일간지 기자가 의원회관에서 박 전 대표와 엘리베이터를 탈 ‘뻔’ 했으나 친박계 구상찬 의원의 ‘저지’로 실패했다는 기사가 난 적이 있다.
그 이후로 2년 반이란 시간 동안 박 전 대표와 친박계를 취재했지만, 그때처럼 박 전 대표를 직접 마주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나 마찬가지였다. 경선 패배 후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뒤 지금까지도 박 전 대표는 ‘미래 권력’으로서 이 대통령에 버금가는 높은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다.
늘 베일에 싸여져 일상적인 취재 활동은 거의 불가능해, 박 전 대표를 담당하는 기자들은 늘 그의 스케줄을 체크하고 동선을 확인하고 미니홈피 정도나 들락날락하며 소일해야 했다. 박 전 대표를 직접 취재할 수 없으니, 현안이 생기면 측근 친박계 의원들의 입을 통해 박 전 대표의 ‘숨은 뜻’을 추측하느라 진땀을 빼곤 했다.(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인 모양)
박 전 대표 취재는 늘 국회 로텐더홀에서 짜여진 각본대로...;;;
이렇게 접근성이 떨어지는 취재원을 따라다니다 보면, 막상 현장에 나타날 때마다 에피소드들이 생긴다. 친박계 초선 의원들 가운데에서는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홍보하기 위해 박 전 대표만 ‘뜨면’ 주변을 배회하는 경우가 잦았다. 박 전 대표로부터 좌우 45도 각도에 서면 방송카메라와 사진에 잘 잡히기 때문에 측근으로서의 ‘증거물’이 되기 때문이다. 18대 의원들이 등원한 후엔 이런 수법으로 언론에 얼굴을 들이미는 ‘3종 세트(대변인 격인 이정현 의원은 제외. 실명은 안 밝히겠음)’ 초선의원들도 있었다.
박 전 대표를 가장 자주 봤던 곳은 국회의사당 로텐더 홀이다. 본 회의가 있는 날이면 박 전 대표는 늘 5~10분 전쯤에 등장했다. 기자들은 마치 마중나온 사람들처럼 죽 도열해 박 전 대표를 맞이하는 식이 됐다. 뿐만 아니라 박 전 대표가 오면 어떤 질문을 할 것인가, 대답을 할 만한 질문과 외면할 만한 질문은 무엇인가, 질문 순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등등 ‘사전 모의 연습’도 필수 절차였다. 생각해보면, 이런 신비주의적인 면모와 언론의 생리가 맞물려 박 전 대표의 아우라를 더욱 키워줬다는 생각도 든다.
2009년 2월 임시국회 당시 기억나는 재미난 일화가 있다. 당시 한창 미디어법과 관련한 논쟁이 시끄러운 시기였는데, 기자들은 박 전 대표의 입장이 궁금했다. 평소 때와 마찬가지로 기자들이 준비를 하고 기다렸는데, 박 전 대표는 거의 개회 직전에 도착했다. 한 기자가 미디어법 직권상정과 관련한 질문을 했고 박 전 대표는 기존 입장만 확인한 채 회의장으로 달려갔다.
기자들도 워딩 하나 놓칠세라 박 전 대표를 따라 우루루 달려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 와중에 회의장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진 것이다. 그러자 박 전 대표는 문 앞에서 딱 멈춰서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묵념을 하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갑작스러운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추가 질문도 못하고 멀뚱멀뚱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뒤따라 오던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가 덩달아 묵념을 하는 재미난 장면도 볼 수 있었다. 박 전 대표의 ‘국가 사랑’과 ‘원칙주의’적인 성격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도 됐지만, 귀찮은 기자들을 떼어내기 위한 수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살짝 해본다.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서는 박 전 대표. 여성이다보니 착용하는 구두나 가방에도 관심이 높았는데, 볼때마다 국산브랜드를 착용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사진 속 구두도 '구X인가?' 싶었는데 알고보니 엘X강X였던 기억이...
박 전 대표는 사석에서는 딱딱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려 했던 것 같다. 사적인 모임에선 늘 ‘오늘의 유머’를 하나씩 던지곤 한다. 어찌 보면 썰렁유머, 허무개그일 수도 있는 이야기들인데 참석자들은 배꼽이 빠질세라 박장대소해 난 그게 더 웃겼던 기억이 난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거의 ‘잠행’하던 박 전 대표와 한나라당 출입 여기자단 몇몇이 오찬을 함께 하게 된 적이 있는데, 의외의 단어를 구사하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잠수는 아니에요’(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지적하자), ‘뽀록날 줄 몰랐어요’(구멍난 스타킹을 신고 있다가 구두를 벗어야 하는 상황이라 언론에 사진이 찍혔던 일화를 소개하며)…. ‘공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치곤 의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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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 되나?? 2011.08.17 1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첩공주보다 침묵공주가 더 맞을듯.
립서비스가 조금 늘었지만, 여전히 그의 진심은 권력 잡기 위한 이미지 쇼를 보여주는 것이다.
최고의 권력을 잡으면 숨긴 것이 드러난다. 이명박씨 처럼.
김소영 2011.08.27 08: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게 잘 읽고 있습니다. 생각도 깊으시구요 전 평소에도 정치인이 불쌍하다고 가끔씩 생각합니다 물론 지돈이 아니라 남의 돈을 쓰니 당연한거지만 재벌과연예인의 꼴사나운 작태에 비해 상대적으로 좀 심한것이. Sxx관련자삭들은 바람을피워대 이혼하거나 10살어린 것과 결혼을 하고 특별한 경영실적이 없어도 가는곳마다 극빈대우를 받고 팔로어를 몰고다니며 기자들도 비판의글은 쓰는걸 못보며 오히려 홍보
김소영 2011.08.27 09: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자본의 힘이 최고인가요? 참 씁쓸합니다. 기자들조차 재벌의 비리와 웃기지도않은 자녀들 초고속 승진과 부의 세습에대해 비판하기보다 연예인외모칭찬하듯 "그래 니들은 엄친아니까"같은 시선으로 잘못은 덮는 분위기고 부러움과 동경을 더해서 과장되게 홍보까지 하는 게 비단 저만 느끼는 걸까요? 정치부기자라 경제쪽은 아니라고 하기에 쓰신 엄친딸의 쿠팡 윤이사를 몇번이나 글로 담으신걸보고 비교됨을느낍니다. 나라른 말아먹고 세금을 낭비하는게 재벌들이 아닙니까 어려을때 공적자금 끌어다쓰고 국민들이 물건사줘서 성장시킨 기업들 이제 명품판매에 치중하고있지만 기자들은 여성오너들의 매출액신장이네 하면서 홍보하고있더군요 아 역시 모든 진실은 돈으로 ?
동굴의 우상 2011.09.23 01: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근혜 전대표를 보면 플라톤의 동굴의 우상이 생각난다. 그녀가 만드는 이미지는 허상이 아닐까? 그녀가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구체적으로 밝힌 적이 있는가? 그녀는 그것을 신비주의 운운하는 측근 및 언론과 공생하는 것이 아닐까? 검증되지 않은 정치인을 선택하는 것은 주사위를 던저 국가의 운명을 거는 것과 같다. 나는 신비스런 가끔식은 엄청 의심스런 최선보다는 검증된 차선을 택하겠다.
서민 교수님께서 재미난 칼럼을 쓰셔서 소개합니다.
[서민의 과학과 사회] 박근혜… ‘침묵’… 포털 검색해보니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9202003595&code=99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