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나 역시 그랬다. 야근을 하고 집에 가는 택시 안, 남편 없는 저녁에 배달시킨 음식을 건네받는 현관 앞, 만원 지하철 안에서 부딪히는 인파 속……. 혹시라도 얼굴도 모르는 비정상적인 남성으로부터 폭력, 추행, 희롱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았다. 매 순간 매 공간, 긴장된 상태를 유지해야 했지만 그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일상화된 공포였다. 그렇게 살았다. 삼십 여 년 동안.
나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들은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러다 운이 나쁘면 실제로 폭력, 추행, 나아가 살인에까지 이르는 물리적 피해의 당사자가 되기도 한다. 여성들은 ‘재수 없게’ 불운을 맞이할까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과한 치장을 스스로 검열한다. 가부장적인 우리 사회 속에서 여성 개인이 이런 방어기제들을 내면화하는 것은 결국 생존을 위한 일이다. 여자로 살아가기란 매일 매일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무사히 ‘살아남는’ 일과도 같다.
분위기는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여성 비하 글, ‘김치녀’로 대변되는 조롱과 여성에 대한 대상화, 페미니즘에 대한 몰이해와 성(性) 대결 양상 등 여성에 대한 혐오 정서는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각종 현상들은 사회가 각박해질수록 더욱 기괴하고 비이성적인 형태로 확장되고 있다. 여성은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러던 차에 “여성이 무시해서” 여성을 골라 살해한 한 남성의 엽기적 살인사건이 터졌다.
사진 출처 : https://pixabay.com
이 사건은 그간 우리 사회에 만연했던 여성 혐오 문제를 공론화하고 있다. 화려한 번화가였던 서울 강남역은 추모와 애도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일상 속에서 잠재된 폭력에 시달리던 여성들은 거리로 나왔다. 여성들은 “우연히 그 시간, 그 장소에 없었기에 살아남았다”는 공감대를 갖고 목소리를 낸다. 여성에게 폭력적인 사회 분위기가 언제든 물리적 위협으로 발화될 수 있음을 목격한 여성들이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현장에서조차 여성에 대한 혐오와 공격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일부 남성들은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본다”면서 목소리 내는 여성들에게 불쾌감을 드러냈다. 여성들의 주장이 모든 것을 남녀의 문제로 치환하는, 유치하고 단순한 이분법적 시각이라는 비난이다. 인간의 사회적 지위란 다층적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데, 오로지 성별만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다. 그러나 남성들의 이런 시각은 오히려 모든 문제를 중층적이고 입체적으로 해석한다는 명분 아래 사건의 핵심 본질을 흐리는 데 악용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러 세대를 거쳐 페미니즘이 진화하는 가운데, 최근까지 정립된 이른바 ‘3세대 페미니즘’의 개념은 여성을 비롯해 모든 차별받는 대상에 대한 저항과 연대의 의미로 확장됐다. 그런데 젠더(gender)의 개념이 다각화되자 아이로니컬하게도, 젠더가 폭력과 차별을 낳는 중요한 요소임은 차츰 망각되기 시작했다. 마침 시대가 진보하며 과거에 비해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자 여성주의는 남성에 대한 역차별로 오인되었고, 남성들은 여성을 잠재적 경쟁자로서 경계하고 배제하며 차별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여성 혐오라는 사회병리적 현상은 결국 ‘여성’이라는 핵심 개념을 재소환하게 한다. 여성의 계급 층위가 사회적 특성, 경제적 계급의 문제 등으로 인해 중층적이라고 하더라도, 여성 혐오의 문제는 여성이라는 단일한 정체성만으로도 불거질 수 있는 문제임을 잊어선 안 된다. 여성 혐오의 수준은 단순한 성적 차별과 조롱에서 시작해, 고용과 노동의 문제에서 맞닥뜨리는 구조적 차별, 그리고 여아 낙태와 여성 살해 등 여성이라는 이유로 생명이 위협받는 ‘페미사이드(Femicide)’까지 단계적으로 심화된다. 여기서 가장 심각한 수준인 생명을 위협하는 문제의 경우는 성별을 뛰어넘어 인류의 문제로 봐야한다.
당사자가 앞장서 고통을 토로하는데, 정작 그것을 느껴보지도 겪어보지도 못한 이들이 이를 비난할 이유가 무엇인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잘 모르는 문제라면 “난 겪어보지 못해 잘 모르겠는데, 대체 그렇게 사는 기분은 어떤 거야?”라고 질문하거나, 적어도 일단 “그렇게 살아왔구나.” 하고 공감할 수는 없는 걸까. 물론 남자도 살기 힘든 세상이라는 건 이해한다. 일자리, 돈, 계급, 불평등의 문제 등으로 인생이 고통 덩어리라는 것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하지만 여성이 그 고통과 상처의 찌꺼기를 배출하는 하수구는 아니다. 다수이고 불특정하다고 해서 마음 놓고 짓밟아도 되는 ‘객체’가 아니다.
배우 엠마 왓슨의 연설로 유명해진 UN의 ‘HeForShe’ 운동은 남성들을 여성 혐오 문제에 대해 스스로 행동해야 하는 주체로 소환하고 있다. 누군가는 주체가 되고 누군가는 객체가 되는 문제를 뛰어 넘어, 이제는 모두가 주체가 되어 이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여진 수많은 포스트잇 속에서 이런 문구들을 발견했다. “남자라서 부끄럽습니다.”, “전 살아남았을 거예요. 남자니까요. 미안합니다.” 스스로 주체가 되기로 한 남자들의 고백을 보면서, 여자인 내 마음은 그만 뭉클해졌다. 바로 이런 것이 출발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2016년 5월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의 '양성평등 미디어'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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