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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나 역시 그랬다. 야근을 하고 집에 가는 택시 안, 남편 없는 저녁에 배달시킨 음식을 건네받는 현관 앞, 만원 지하철 안에서 부딪히는 인파 속……. 혹시라도 얼굴도 모르는 비정상적인 남성으로부터 폭력, 추행, 희롱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았다. 매 순간 매 공간, 긴장된 상태를 유지해야 했지만 그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일상화된 공포였다. 그렇게 살았다. 삼십 여 년 동안.

 

나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들은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러다 운이 나쁘면 실제로 폭력, 추행, 나아가 살인에까지 이르는 물리적 피해의 당사자가 되기도 한다. 여성들은 재수 없게불운을 맞이할까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과한 치장을 스스로 검열한다. 가부장적인 우리 사회 속에서 여성 개인이 이런 방어기제들을 내면화하는 것은 결국 생존을 위한 일이다. 여자로 살아가기란 매일 매일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무사히 살아남는일과도 같다.

 

분위기는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여성 비하 글, ‘김치녀로 대변되는 조롱과 여성에 대한 대상화, 페미니즘에 대한 몰이해와 성() 대결 양상 등 여성에 대한 혐오 정서는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각종 현상들은 사회가 각박해질수록 더욱 기괴하고 비이성적인 형태로 확장되고 있다. 여성은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러던 차에 여성이 무시해서여성을 골라 살해한 한 남성의 엽기적 살인사건이 터졌다.

 

 

사진 출처 : https://pixabay.com

 

이 사건은 그간 우리 사회에 만연했던 여성 혐오 문제를 공론화하고 있다. 화려한 번화가였던 서울 강남역은 추모와 애도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일상 속에서 잠재된 폭력에 시달리던 여성들은 거리로 나왔다. 여성들은 우연히 그 시간, 그 장소에 없었기에 살아남았다는 공감대를 갖고 목소리를 낸다. 여성에게 폭력적인 사회 분위기가 언제든 물리적 위협으로 발화될 수 있음을 목격한 여성들이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현장에서조차 여성에 대한 혐오와 공격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일부 남성들은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본다면서 목소리 내는 여성들에게 불쾌감을 드러냈다. 여성들의 주장이 모든 것을 남녀의 문제로 치환하는, 유치하고 단순한 이분법적 시각이라는 비난이다. 인간의 사회적 지위란 다층적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데, 오로지 성별만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다. 그러나 남성들의 이런 시각은 오히려 모든 문제를 중층적이고 입체적으로 해석한다는 명분 아래 사건의 핵심 본질을 흐리는 데 악용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러 세대를 거쳐 페미니즘이 진화하는 가운데, 최근까지 정립된 이른바 ‘3세대 페미니즘의 개념은 여성을 비롯해 모든 차별받는 대상에 대한 저항과 연대의 의미로 확장됐다. 그런데 젠더(gender)의 개념이 다각화되자 아이로니컬하게도, 젠더가 폭력과 차별을 낳는 중요한 요소임은 차츰 망각되기 시작했다. 마침 시대가 진보하며 과거에 비해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자 여성주의는 남성에 대한 역차별로 오인되었고, 남성들은 여성을 잠재적 경쟁자로서 경계하고 배제하며 차별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여성 혐오라는 사회병리적 현상은 결국 여성이라는 핵심 개념을 재소환하게 한다. 여성의 계급 층위가 사회적 특성, 경제적 계급의 문제 등으로 인해 중층적이라고 하더라도, 여성 혐오의 문제는 여성이라는 단일한 정체성만으로도 불거질 수 있는 문제임을 잊어선 안 된다. 여성 혐오의 수준은 단순한 성적 차별과 조롱에서 시작해, 고용과 노동의 문제에서 맞닥뜨리는 구조적 차별, 그리고 여아 낙태와 여성 살해 등 여성이라는 이유로 생명이 위협받는 페미사이드(Femicide)’까지 단계적으로 심화된다. 여기서 가장 심각한 수준인 생명을 위협하는 문제의 경우는 성별을 뛰어넘어 인류의 문제로 봐야한다.

 

당사자가 앞장서 고통을 토로하는데, 정작 그것을 느껴보지도 겪어보지도 못한 이들이 이를 비난할 이유가 무엇인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잘 모르는 문제라면 난 겪어보지 못해 잘 모르겠는데, 대체 그렇게 사는 기분은 어떤 거야?”라고 질문하거나, 적어도 일단 그렇게 살아왔구나.” 하고 공감할 수는 없는 걸까. 물론 남자도 살기 힘든 세상이라는 건 이해한다. 일자리, , 계급, 불평등의 문제 등으로 인생이 고통 덩어리라는 것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하지만 여성이 그 고통과 상처의 찌꺼기를 배출하는 하수구는 아니다. 다수이고 불특정하다고 해서 마음 놓고 짓밟아도 되는 객체가 아니다.

 

배우 엠마 왓슨의 연설로 유명해진 UN‘HeForShe’ 운동은 남성들을 여성 혐오 문제에 대해 스스로 행동해야 하는 주체로 소환하고 있다. 누군가는 주체가 되고 누군가는 객체가 되는 문제를 뛰어 넘어, 이제는 모두가 주체가 되어 이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여진 수많은 포스트잇 속에서 이런 문구들을 발견했다. “남자라서 부끄럽습니다.”, “전 살아남았을 거예요. 남자니까요. 미안합니다.” 스스로 주체가 되기로 한 남자들의 고백을 보면서, 여자인 내 마음은 그만 뭉클해졌다. 바로 이런 것이 출발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2016년 5월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의 '양성평등 미디어'에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이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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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13일 치러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는 여러 이슈와 역사적 기록을 남겼다. 공고했던 여당의 과반의석이 무너지고 16년 만에 여소야대 정국이 되었다. 고약한 지역주의에 붕괴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고, 우리 정치를 지배하던 양당 구도에도 균열이 일어났다. 국민이 투표를 통해 독선과 불통의 박근혜 정부를 심판했다는 해석이 쏟아졌다.

 

 

나는 이 거대 이슈들 틈에서, 크게 주목받진 못했지만 한 여성이 던진 메시지에 주목했다. 바로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에 출마한 남영희 후보의 메시지다. 그는 출사표에 천만 주부를 직능으로 인정하고 대표할 비례대표 한 명쯤은 필요하다”, “주부를 소외계층으로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정치권에 경종을 울리고 싶다고 밝혔다. 비록 그는 비례대표 33번을 받아 낙선했지만, 우리 사회가 그의 이야기에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주부라는 이름은 곧 사회적으로는 무능하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하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나 역시 주부라는 이름을 달게 된 후론, 그러한 세간의 선입견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생각하게 됐다. 주부들이 담당하는 가사 및 육아 노동은 공식적인 경제 활동으로 환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실상 무노동 무임금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사회의 노동력 생산을 위해 필수적인 주부들의 노동이 없다면 사회는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가사와 육아는 생활과 가장 많이 밀착된 분야여서, 이를 주로 담당하는 주부들의 정치적 감수성은 누구보다도 생생하다. 그리고 아주 실질적인 문제로부터 발현된다. 나도 주부이자 워킹맘으로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한국의 성평등 정책과 보육 정책, 나아가 복지 정책에까지 관심을 갖게 됐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시장의 소비 지형과 들쑥날쑥 하는 물가를 몸으로 경험하면서 민생과는 따로 노는 경제 정책을 비판하게 됐다. 주부의 삶은 자연스레 살아있는 정치의 이슈로 이어지지만, 우리 사회는 이들의 시선과 문제의식을 생산적으로 활용하지 못한다.

 

 

 

그림 출처 : https://pixabay.com


남성 주부도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주부란 대부분 여성에게 주어지는 역할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여성들은 정치에서 소외되어 있다. 가사와 육아라는 보이지 않는 노동에 치여 여성은 갈수록 사회에서 배제되고 도태된다. 사회적으로 지분이 적은 여성의 문제는 수많은 거대 담론에 밀려 후순위로 처진다. 누구보다도 사회의 모순과 문제점을 피부로 경험하지만, 정작 사회의 시스템을 만들고 고치는 일 앞에서는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다. 남성이 만든 세계의 질서에서 파생되는 문제들을 여성이 고스란히 감당하는 꼴이다.

 

저출산, 보육, 일과 가정의 양립, 양성평등, 여성의 경력단절……. 요즘 들어 여성의 삶과 관련한 화두가 공공의 이슈로 자주 언급된다. 이런 이야기들이 공적인 관심거리로 떠오르는 것은 결국 이것이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다. 핵가족 사회가 지속되고 여성의 사회진출이 확대되면서 여러 문제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이야기다.

 

 

여성의 삶이 개선되지 않으면 함께 살아가는 남성의 삶도 고통에 내몰린다. 주범은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문화와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각종 법과 제도, 정책들이다. 결혼과 출산, 육아를 계기로 여성은 사회에서 차별받거나 저급한 일자리에 내몰린다. 그러다 경제활동의 짐은 집안의 가장인 남성에게 죄다 주어지고, 그런 남성을 주축으로 하는 조직 문화는 갈수록 조직에만 몰입하도록 고착화된다. 일과 가정의 양립이 가능한 사회와는 점점 멀어지고, 사회구성원들의 삶의 질이 동반 하락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우리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려면 생활 정치의 영역이 확대되고 중시되어야 한다. 결국 보다 더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되어야 한다. 다행히 지난 4·13 총선에서는 헌정사상 최다인 51명의 여성 당선자가 배출됐다. “여성이 너무 똑똑하면 밉상이라던 여당의 여성 정치인은 똑 부러지기 짝이 없는 야당의 여성 정치인에게 패했다. 남녀를 막론하고 젠더 감수성이 어느 때보다 절실해진 시대임을 말해준다. 20대 국회가 다른 어떤 거대 담론만큼이나 여성 이슈와 생활 정치에 주목하기를 기대한다.

 

*이 글은 2016년 4월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의 '양성평등 미디어'에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이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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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때엔 나도 그 소주를 꽤나 마셨던 듯하다. 지역마다 그 지역 토종 소주가 가장 인기라는데, 내가 나고 자란 대구에서는 사람들이 꼭 그 소주만 고집했다.

 

최근 그 소주를 만드는 주류기업 금복주가 입방아에 올랐다. 결혼을 앞둔 여성 직원에게 퇴사를 종용했다는 것이다. 결혼을 이유로 그 직원의 업무 성과가 낮아졌다거나 회사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니었다. 그저 회사에 여직원이 결혼하고 근무한 선례가 없다는 이유였다. 당사자가 항의하자 사측의 한 인사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화장실에 유축기 들고 가서 짜고 앉아있다는 성차별적이고 모욕적인 말까지 내뱉었다고 한다. 또 해당 직원을 업무에서 배제하는 식으로 조직적으로 압박해 결국 퇴사에 이르게 만들었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갑갑해진다. 이제껏 사무직 직원 가운데 결혼 후 일을 한 여성이 한 명도 없었다니, 일하는 기혼 여성의 한 사람으로서 회사의 분위기가 과연 어땠을까 상상해보면 끔찍하기까지 하다.

 

모든 질서가 한 가정의 가장, 혹은 미래의 가장인 남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는 조직. 사실 이런 조직은 한국 사회에서 흔하디흔하게 볼 수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 여성 가운데 육아휴직 제도를 이용하는 경우는 10명 중 2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10명 중 나머지 8명은 육아휴직 제도를 써보지도 못한 채 출산 후 회사로 복귀했다는 뜻이다. 그만큼 이 나라는 여성과 가정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한국의 육아휴직률은 OECD 회원국 24곳 가운데 뒤에서 3번째인 수준이다.

 

남성이 중심이 되는 조직에서는 생리휴가처럼 여성을 위한 복지는 아예 불필요한 제도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덩달아 남성도 이용 가능한 육아휴직과 같은 제도도 마찬가지다. 육아란 당연히 조직의 구성원인 남성을 집에서 내조하는 여성의 몫이라 여길 테고, 굳이 남성 직원에게까지 육아휴직을 승인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일과 가정 모두가 양립 가능한 기업 문화를 꿈꾸는 것은 현실감 없는 사치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아예 고용 시장에 진출하는 것부터가 어렵다. 많은 여성들이 신입사원 면접장에서부터 결혼하면 퇴사할 것이냐는 질문에 시달리는 게 현실이다. 기업은 더 높은 생산성과 효율성을 위해 최대한 조직 논리에 충실할 구성원을 뽑으려 하고, 결혼·임신·출산·육아 등 (기업의 관점에서 볼 때) 지극히 사적인 여성의 이벤트를 위해 비용을 감당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여성이라는 성별은 이미 고용 시장에서 마이너스 옵션과 같은 스펙이 되고, 결국 여성에게 질 낮은 노동과 불안한 비정규직 일자리가 주어지는 일이 다반사로 이루어진다.

 

여성이 취업하기도 힘들고, 막상 취업해도 결혼과 육아로 인해 일을 계속할 수 없으며, 경력이 단절된 후 다시 일을 하고 싶어도 양질의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현실. 이런 배제의 악순환은 왜 끊이지 않을까.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이 경제활동을 위해 몸담고 있는 기업이 바뀌지 않으면 이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결혼을 이유로 퇴사를 종용하고, 임신을 했다고 한직에 발령을 내는 일이 허다한 기업들의 행태는 애초부터 여성의 사회진출 자체를 막는다. 육아와 가정 일에 신경 쓰는 엄마들을 무능하고 파렴치한 조직원으로 만들어 버리고, 잦은 야근과 회식으로 조직에 대한 충성도를 실험하는 문화로 아빠들은 가정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기업이 앞장서서 일과 가정이 양립 가능한 사회를 가로막는 꼴이다.

 

그런데 그것이 꼭 기업만의 문제일까. 여성을 고용하지 않아도, 결혼과 임신을 이유로 여성을 잘라도, 엄마 직원들을 차별해도 기업으로선 손해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는 기업이 여성을 배제하는 게 이득일 것이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생리를 감안하면 기업에게만 양성평등을 위한 노력을 강요할 수 없는 노릇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여론이나 자선사업, 자원봉사 정도로는 부족하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규칙이다. 만약 이 사회가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여성이 강요당하는 부당한 처우와 차별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규칙을 채택한다면? 남녀의 생물학적 성별에 따른 차이를 인정하는 전제 하에 고르고 균등한 기회 속에서 정당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규칙을 정한다면? 저 출산 시대의 여러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산과 육아의 시기에 남녀 모두 이 문제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규칙을 만든다면? 아마도 그런 규칙이 전제되는 사회라면 기업도, 문화도, 개인의 삶도 모두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규칙을 만드는 것은 정치다. 사회를 움직이는 법과 제도를 만들고 실행하는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이 바뀔 수 없다. 문제의 회사에서 만든 소주를 사먹지 않겠다는 불매운동도 좋지만, 당장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는 일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결혼한 여성이자, 아이 키우는 엄마이자, 대구에서 그 소주를 사먹던 사람으로서 이 문제를 그냥 보아 넘기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마침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글은 2016년 3월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의 '양성평등 미디어'에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이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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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북유럽풍이 수년 째 유행이다. 북유럽풍 인테리어, 북유럽풍 옷, 북유럽풍 소품들……. 처음엔 지구 반대편에 자리한 북유럽 스타일이 한국에서 왜 이리도 사랑을 받는지 의아하기도 했다.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보니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북유럽풍을 지향하는 상품들은 주로 생활이나 육아 관련 분야에 많다. 하긴 북유럽풍 하이힐, 북유럽풍 노트북, 북유럽풍 서류가방 따위는 들어보지 못했다. 이를 소비하는 계층은 주로 여성, 그것도 아이를 가진 주부들인 경우가 많다. 결국 북유럽을 소비하는 주인공은 엄마들인 셈이다.

 

북유럽은 복지 제도가 훌륭한 곳으로 유명하다. 국가가 사회적 약자에 대해 잘 배려하고, 국민 모두 균형 있게 잘 살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이야기다. 여성이 살기에도 좋다. 양성평등 수준이 높고, 전통적인 남녀의 성역할에 대해 유연한 분위기다. 남성 육아휴직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며, 일터에서 늦게까지 일하지 않으니 남녀 모두 가정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과 잘 놀아주고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남성을 스칸디 대디라 부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엄마들이 이상적인 가족과 남편의 모습, 여성으로서 자신의 삶을 그럴 듯하게 그려볼 수 있는 북유럽을 열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북유럽풍의 이란 사실 짝퉁의 완곡한 표현이지만, 그럼에도 북유럽 사람들처럼 살고 싶은 강한 심리가 북유럽풍 유행을 견인하는 힘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결국 한국 사회가 북유럽에서 꿈꿀 수 있는 이상향이 결핍된 곳임을 명확히 역설하는 것 같아서 씁쓸해진다.

 

아예 북유럽 국가로 이민을 떠나려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북유럽 국가에 체류 중인 재외동포 인구는 20072천여 명에서 20134천여 명으로 6년 만에 2배나 증가했다. 모든 것이 경쟁일 뿐이며 낙오하면 모든 것이 끝인 헬조선을 탈출해, 실패해도 기회가 주어지고 배려를 받을 수 있는 북유럽에서 인간답게 살아보겠다는 것이다. 하긴 이 사회는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해야 하는 ‘3포 세대도 모자라,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 셀 수도 없는 ‘N포 세대로 가득하니 그럼직도 하다.

 

N포 세대를 양산하는 이 사회는 미래도 불투명하다. 저출산 문제에 대해 여당의 대표라는 사람은 아기를 많이 낳는 순서대로 (여성) 비례 공천을 줘야 한다고 말한다. 아기를 낳고 싶어도 현실적인 장벽 때문에 그럴 수 없는 세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출산과 육아를 개인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협소한 사고방식을 가진 것이 이 나라 정치인들의 수준이다. 국가와 시스템에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이 요즘 한국 사람들의 정서인 이유를 알 것 같다.

 

반면 세계 최고의 석학으로 불리는 한스 로슬링 교수는 “(한국의 저출산 문제는) 페미니즘을 통해 변화가 올 것이라고 말해 주목을 받았다.(2015104일 경향신문) 로슬링 교수는 북유럽인 스웨덴 출신이다. 그는 사람들이 인구 정책이 아니라 양성평등이 이루어 질 때 아기를 낳고자 하고, 전통적인 성역할이 파괴되고 전복될 때 사회 전체의 효율성도 높아진다고 말한다. 사회 문화적, 구조적 접근을 통해 문제의 본질에 다가서는 것이다.

 

어쩌면 북유럽을 열망하는 이들이 꿈꾸는 삶의 질이란 진정한 양성평등을 이루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삶의 수준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인 한국 사회의 고정된 관습, 유교적이고 보수적인 문화는 늘 남녀의 역할을 규정짓고 틀 속에 가두는 성불평등의 문제를 품고 있다. 남성 중심적인 문화, 극단적인 여성혐오와 폄훼 문제 등은 한국인의 삶을 더욱 불쌍하게 전락시키는 핵심 요인들이 아니던가.

 

로슬링 교수는 여성의 권익이 향상되면 남자도 살기 좋아진다고 말했다. “남성의 어깨에 있는 짐을 일부 내려놓으면 남성도 편해진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북유럽풍의 이미지만 좇다가 좌절하거나, 한국을 떠날 궁리만 하는 게 최선은 아닌 듯하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길이 양성평등에 있음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 글은 2015년 11월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의 '양성평등 미디어'에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이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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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커서 어른 되면 어떻게 될까? / 아빠처럼 넥타이 매고 있을까? / 엄마처럼 행주치마 입고 있을까? / 랄랄라 다 같이 흉내 내보자. / 나는 엄마, 나도 엄마. 아빠 다녀오세요. 호호. / 나는 아빠, 나도 아빠. 여보, 여보 다녀왔소.”(동요 <어른 되면>)

 

아이와 함께 동요를 듣다 화들짝 놀랐다. 어릴 때 무심코 듣고 따라 불렀던 기억이 있는 노래이긴 한데, 가사가 이런 줄은 이제야 알았다. 노래 속에서 아빠는 넥타이를 매고 일을 하러 나가고, 엄마는 행주치마를 입고 아빠를 반긴다. 전형적인 전근대적 성역할로 엄마와 아빠의 모습을 구분하고 있는데, 이게 2015년 오늘날에도 거리낌 없이 유통되고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직접적인 경험만큼 아이들에게 영향력 있는 것은 없지만, 우리가 늘 가까이 접하는 미디어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다. 아이들은 책, 텔레비전, 음악 등 다양한 간접 경험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사회를 이해한다. 그런데 그 속에 담긴 이야기가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심어주고 심지어 성차별적인 내용이라면? 그런 내용을 지속적으로 접한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는 세상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이미 어른인 우리가 접하는 미디어에서 고정된 성역할이 그려지고 있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9월 미디어오늘은 1997년부터 2015년까지 총 36편의 KBS 주말드라마 속 남녀 직업을 조사해 발표했는데, 남성 등장인물의 직업은 기업체의 사장(CEO)이 가장 많았던 반면 여성 등장인물의 직업 중 가장 많은 것은 가정주부였다. 직업을 가진 여성의 비율이 높아지긴 했지만 전문직 비중은 남성보다 현저히 작았다. 지난 6월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과 서울YMCA가 공동으로 진행한 방송사 시사 토론 프로그램 모니터링 분석에서는 프로그램에 등장한 남녀의 비율이 21 정도로 불균형했다. 방송에서의 역할도 남성은 전문성, 여성은 이미지를 강조하는 경향을 띄어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심어주고 있었다고 한다.

 

 

MBC <진짜사나이> 여군특집편. 출처 : MBC 홈페이지 화면캡처

 

 

최근 TV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아예 여성 고정 출연자를 찾아볼 수 없다. MBC <무한도전>, KBS <12>, SBS <런닝맨> 등 대표적인 지상파 주말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전원이 남성 출연자로 구성되어 있거나 여성 출연자는 극소수에 그친다. 여성들이 대거 출연하는 경우는 MBC <진짜 사나이>의 여군 특집에서나 있는 일인데, 예능에서 여자 연예인이 기근인 시대에 진짜 사나이가 되어야만 프로그램에 얼굴이라도 내비칠 수 있다는 게 아이러니다. 하긴, 예능에서 여성이 살아남기란 참 힘들다. 예전부터 예능에 나오는 여성을 평가하는 잣대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외모였다. 예쁘지 않은 여성은 웃기기라도 해야 하고, 예쁜 여성이라면 너무 멍청하거나 너무 똑똑해선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십상이다.

 

미디어가 여성을 가두는 틀은 가부장제 문화다. 남성의 시선으로 볼 때 불편하거나, 남성의 지위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는 면은 되도록 보여주면 안 된다는 게 불문율이다. 미디어에 등장할 정도로 성공한 여성에 대한 시선들은 날이 서있고 불공정한 경우가 많다. 기자로서 유명하고 능력 있는 여성 인터뷰이들을 많이 만났지만, 그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시기와 질투로 인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강한 이미지의 여성은 너무 나댄다는 평가가 뒤따랐고, 사회적으로나 가정생활에서나 성공한 여성에게는 남편과 사이가 안 좋다는 소문이 맴돌았다. 한 명의 여성이자 딸 가진 엄마로서 안타깝고 답답한 노릇이다.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 표지. 출처 : www.aladin.co.kr

 

얼마 전 동화작가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을 아이들과 함께 읽었다. 집에서 모든 가사를 도맡아하는 엄마가 사라지자 아빠와 두 아들은 돼지가 되어버리는데, 이들이 엄마가 돌아온 후 개과천선(?)해 요리도 하고 집안 청소도 함께 하면서 온 가족이 행복해진다는 이야기다. 마지막 장에서 엄마는 자동차 수리를 하며 웃는다. 페미니즘의 요소가 들어간 동화라는 점에서 무척 흥미진진하게 보았다.

 

아이들에게 <어른 되면> 같은 동요는 안 들려주고 <돼지책> 같은 책을 골라서 읽혀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자라면서 자연스레 경험하고 목격하게 될 수많은 성차별과 고정된 성역할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할까 걱정이 되었다. 부디 대중매체에서만이라도 <돼지책>처럼 양성평등적인 메시지가 많이 등장하길 바란다.

 

*이 글은 2015년 10월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의 '양성평등 미디어'에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이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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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아이를 낳은 후 꿈에 그리던 완모(완전 모유수유의 줄임말로 아이에게 모유만 먹이는 것)이 되었다. 태어나자마자 젖병에 길들여진 첫째 아이 때문에 오랫동안 유축맘(유축기로 짜낸 모유를 젖병에 담아 먹이는 엄마)’으로 고생을 해서인지, 아이에게 직접 젖을 물릴 수 있다는 사실(엄마들은 이를 직수라고 부른다)이 무척 감격스러웠다.

 

그런데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다. 얼마 전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엄마들 가운데 2015년생 아이를 둔 엄마들끼리 카페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는데, 한 엄마가 그 자리에서 모유수유를 하는 것을 보았다. 카페에는 우리들뿐이었고 다른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게끔 뒤돌아 앉긴 했지만, 공공장소에서 수유하는 엄마를 본 것은 처음이라 꽤 놀랐다. 공공장소에서의 모유수유, 괜찮은 걸까.

 

찾아보니 외국에서는 공공장소에서의 모유수유 문제가 오랜 논란거리였다. 지난해 영국 런던의 한 호텔에서 모유수유를 하던 30대 엄마 루이스 번스는 호텔 측으로부터 가슴을 가릴 것을 요구받았다. 호텔 측이 다른 손님들을 위해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요구한 것인데, 이는 모유수유가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든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어서 소식을 알게 된 엄마들이 분개하며 호텔 앞에서 단체로 모유수유를 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영국은 공공장소에서 모유수유하는 여성을 내쫓지 못하도록 하는 평등법을 채택하고 있다.

 

2011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도 한 매장의 어린이 놀이장소에서 모유수유를 하던 샤논 스미스가 매장 측으로부터 수유를 중단할 것을 요구받았다. 스미스가 이 사연을 블로그에 털어놓아 세상에 알려지자, 캐나다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수많은 엄마들이 분노했다. 이후 스미스는 공공장소에서의 모유수유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기도 했다. 미국과 유럽의 많은 엄마들은 공공장소 모유수유가 보호받아야 할 모성의 권리라고 보고 있다.

 

미국에서는 공공장소 모유수유에 대해 법률로 정하고 있는 주가 많다. 물론 각 주마다 관련 법 조항은 다르다. 그중 모성은 우선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는 인식 아래,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모유수유를 할 수 있는 곳은 노스캐롤라이나, 메릴랜드 등에 한정된다고 한다. 반면 대부분의 주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여성의 가슴을 드러내는 것이 품위없는 행동이라는 인식에 기반해 공공장소 모유수유를 제한하고 있다.

 

 

출처 : https://pixabay.com/ko

 

한국은 관련법은 없지만, 공공장소에서의 모유수유가 늘 논란거리다. 엄마들이 자주 가는 포털 카페에는 잊을 만하면 공공장소에서의 모유수유,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글이 올라오곤 한다. 댓글로는 찬반 논쟁이 뜨겁다. “어떤 장소에서 해도 상관없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냐라는 찬성 입장과 아무리 아기가 보챈다고 해도 최소한의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는 반대 입장이 팽팽하다. 우리 사회는 공공장소에서 모유수유를 하는 것이 어려운 분위기다. 최근 한 조사에서 한국의 엄마 10명 가운데 7명은 공공장소에서의 모유수유에 대해 부끄럽다고 답했다. 반면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자연스럽다고 답한 엄마가 10명 가운데 6명에 달했다.

 

공공장소 모유수유에 대한 논란은 여성의 가슴이 가지는 여러 상징성 때문에 벌어진다. 현대 사회에서 여성의 가슴은 주로 남성에게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신체의 일부로서 대상화된다. 타인에게 여성의 가슴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는 남성중심주의와 가부장적인 사고가 뒷받침하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여성 억압과 상품화를 거부하는 상징으로 가슴을 역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1960년대에는 브래지어를 여성의 몸을 억압하는 도구라 여겨 벗어던지고 불태우는 페미니스트들의 퍼포먼스도 있었고, 요즘은 억압과 상품화의 대상이 된 여성의 몸을 거꾸로 시위의 도구로 이용한다는 의미로 가슴을 노출한 채 시위를 벌이는 토플리스 시위도 있다. 공공장소 모유수유는 여기에 모성이라는 논점이 더해져 논란을 확장시킨다.

 

최근 한국에서는 맘충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엄마(Mom)라는 단어에 벌레 충() 자를 합성한 단어인데, 말 그대로 무 개념 엄마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아이가 잘못을 해도 제재하지 않고 아이 편만 들거나, 타인을 불쾌하게 만드는 일에도 사과는커녕 아이를 방치하는 엄마들을 가리킨다.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여성혐오 분위기 속에서, 그 대상이 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져 왔던 모성에까지 향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걱정스럽다. 일부 몰지각한 엄마들의 이기적인 행동들도 문제지만, 특정 계층을 벌레에 빗대 비하하는 말을 모든 엄마들에게 일반화하듯 사용하는 것은 무척 위험하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OO이란 용어는 배려가 필요한 약자들을 혐오와 멸시의 대상으로 짓밟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괜한 우려인지 모르겠으나, 조만간 공공장소에서 불가피하게 모유수유를 하는 엄마들에게 맘충이라며 손가락질하는 사건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들의 가슴을 성적대상화하는 일도 생기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언감생심, 한국에서 공공장소 모유수유는 꿈도 못 꿀 일인 듯하다.

 

아이를 데리고 외출을 해보면 마음 놓고 수유할 수 있는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수유할 곳을 찾지 못해 배고파 우는 아이를 안고 헐레벌떡 뛰었던 적도, 수유 공간이 마땅찮을 것 같으면 아예 외출을 포기한 적도 있다. 여자들에게 아이 낳으라”, “모유수유하라고 권장하면서도 정작 엄마들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게 꽁꽁 묶어두는 이 사회는 얼마나 모순덩어리인가. 토플리스 시위나 공공장소 모유수유 시위를 할 용감한 페미니스트가 못돼, 목소리 높여 외칠 말이 수유실을 확장하라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 머쓱할 따름이다.

 

 

*이 글은 2015년 8월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의 '양성평등 미디어'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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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딸기21 2015.08.26 16: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은아, 재미있게 잘 읽었어. 오른쪽 마우스클릭 제한 풀어줘~
    그래야 소셜미디어에 링크할 때 맛뵈기 구절 퍼갈 수 있거든.

'거실에 TV 없애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난 후 첫째 아이에게 소홀해지다보니, 심심해진 첫째가 TV를 심하게 찾기 때문이다. 특히 <꼬마버스 타요>를 유난히 좋아하는 녀석은 아침에 눈 뜨자마자 "타요!"를 외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다 유아기에 폭풍 성장한다는 아이의 뇌세포가 더 이상 증식하지 못할 것이란 걱정에 TV를 치우고 대신 책장을 꺼내놓기로 했다.

 

방안에 TV를 감금(?)한 후 나타나는 변화는 놀랍다. 우선 아이가 TV를 거의 찾지 않는다. DVD만 남겨둔 거실에서는 TV 소리 대신 피아노 연주 소리가 배경 음악이 됐고, 아이는 책, 장난감 등으로 스스로 놀 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런 변화를 보이니 엄마로서는 매우 만족스럽다.

 

그런데 하나 더 만족스러운 것이 있다. 바로 나 자신의 만족감이다. 거실을 서재처럼 꾸미니, 당장 책을 꺼내 읽을 시간은 부족하지만 그득한 책들만 보아도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동안 거실이 TV와 아기 용품과 장난감으로 가득 차 나를 위한 공간이 별로 없었는데, 서재로 꾸민 거실이 마치 나를 위한 차분한 북카페처럼 느껴진다.

 

몸이나 마음이나 '건강'이라면 자신 있었던 나지만, 아이를 둘 낳고 하루 종일 육아에 매달리다보니 어느새 많이 지쳐있었다. 흔히 말하는 산후우울증이 나에게도 찾아왔는지, 혼자서 아이 둘과 씨름할 때면 알 수 없는 우울감이 밀려왔다.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행복했지만 무조건적인 돌봄을 필요로 하는 두 아이들에게 끝없이 내어주기만 하는 일은 고된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앞으로 나의 인생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하는 우려와 두려움마저 생겼다. '거실의 서재화'는 나를 위한 우울증 처방약이기도 했던 셈이다.

 

 

출처 : 국가건강보험정보포털. http://health.mw.go.kr

 

여성들은 출산 후 3개월 내에 어느 정도의 우울감을 겪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다. 산후우울증에 대한 이야기는 "산후우울증을 앓던 여성이 자신의 아이를 살해했다" 식의 끔찍한 뉴스로 접하게 된다. 극단적인 사례를 떠들썩하게 보도하는 미디어로 인해 산후우울증은 마치 병적 질환처럼 인식되고 있다. 또 여성에게 무조건적인 모성을 강요하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도 여성을 고립시킨다. '아무리 힘들어도 엄마니까 견뎌야 한다'는 주변의 시선과 강박은 그렇지 못한 여성들을 스스로 자책하게 하고 더욱 우울하게 만든다.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우울감을 혼자서 감내하며 극복하고 있다.

 

요즘 엄마들은 이른바 '가방끈 긴' 여성들이다. 그동안 자신의 성공과 성취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여성들에게 엄마라는 이름은 갑자기 들이닥친, 준비되지 않은 낯선 책임과 의무와도 같다. 자아도 지키고 싶고, 엄마로서의 역할도 잘 해내고 싶은데 이것이 당최 쉬운 일이 아니다. 옛날처럼 대가족 안에서 육아를 도와줄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파트처럼 이웃과의 왕래가 부족한 주거 환경에서는 주변의 도움을 구하기도 어렵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마음 놓고 쓸 수 없거나,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고용 불안을 겪는 현실은 여성을 더욱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다. 가족이나 사회 시스템으로부터 육아의 어려움을 나눌 수 없는 '독박 육아'를 하는 여성들의 심적 고통은 커질 수밖에 없다.

 

육아휴직을 하고 두 아이를 키우면서 내게 가장 절실한 것은 육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누군가였다. 산후조리 때문에 몸이 힘들 때는 지방에 계신 친정 엄마와 시어머니께 S.O.S를 쳤는데 사실 몸조리보다 더욱 필요한 것은 대화였다. 출산 후 남편이 집안일을 거의 도맡아하다시피 했는데도 정작 내가 가장 힘든 때는 아이를 먹이고 재우는 일 등 '엄마'의 영역에 대해 남편과 공유하지 못할 때였다. 시간이 흐르니 주변에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 첫째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 선생님, 하원 후 놀이터에서 만나는 또래 엄마들, 엄마들의 인터넷 커뮤니티로부터 나도 모르게 위로를 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육아로 인해 사회와 단절됨으로써 느끼는 상실감을 극복하고 싶고, 아이를 돌보는 나의 수고로움에 대해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엄마들의 육아 이야기를 다룬 TV 프로그램 <엄마사람>. tvN 화면캡처

돌봄 노동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은 아주 기초적인 수준이다. 어린이집을 확충하고 공공도우미를 늘리거나 보육 기관의 돌봄 시간을 늘려 사회가 보육의 일부를 함께 나누는 일도 필요하지만, 고립된 육아를 하는 현대 여성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주고 소통의 기회 만들어 주는 공공의 장이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의 탄생>의 저자 안미선은 "여성들이 서로 공통적인 경험을 논의하고 문화적, 사회적 관습과 제도를 바꾸어나가는 주체가 되도록 네트워크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아직 그런 사회적 시스템이 충분치 않다보니 엄마들은 지역 사회에서, 인터넷 공간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공유와 공감의 공간을 만들고 있다. 최근 이들은 생활의 영역에서 확장해 사회와 정치의 문제로까지 인식의 폭을 넓히고 목소리를 낸다. 예전엔 '할 일없는 아줌마들의 수다장'으로만 폄하하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편협했던 나의 인식이 부끄럽기만 하다. 홀로 육아로 씨름하는 여성들이 열린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거실을 서재로 바꾸는 작지만 행복한 변화처럼, 의미 있는 변화들을 함께 만들어내며 우리 자신들도 치유할 수 있기를. 이 시대 수많은 엄마들에게 파이팅을 외쳐본다.

 

 

*이 글은 2015년 6월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블로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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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 21, 둘째 아이를 낳았다. 천사같이 예쁜 딸아이다. 둘째 아이는 순탄하다더니, 정말로 출산 과정부터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모든 것이 순조롭게 느껴진다. 작고 앙증맞은 입술로 엄마 젖을 찾아 힘차게 빠는 모습을 보면 이런 행복이 또 있을까 싶다. 세상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는 요즘이다.


그런데 딸아이를 보며 바보 같은 미소를 머금는 남편은 가끔씩 한숨을 쉬곤 한다. 벌써부터 '딸 바보' 아빠의 면모를 발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이 험한 세상에서 딸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하는 걱정 때문이란다. 우스갯소리처럼 들으며 씩 웃곤 했는데, 불현듯 이게 그냥 웃어넘길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 좋게도, 지금까지의 나는 여자로서의 한계나 벽을 거의 느끼지 않고 살아왔다어머니 세대의 삶을 지켜보며 자라왔지만, 우리 세대의 여성은 그와는 다른 삶을 살 것이라 생각했었다. 나의 부모님은 사회가 규정하는 '여성성'을 강요하지 않는 분들이셨고, 이른바 알파 걸로서 학창 시절을 보냈으며, 졸업 후 안정된 정규직 일자리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후, 여성의 삶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딸아이를 갖게 된 지금은 더욱 그렇. ‘여성이라는 이름표를 갖고 살아갈 아이에 대한 걱정 때문일까.


여성의 삶은 녹록치 않다. 지구상의 수많은 여성 가운데, 고등 교육을 받고 대학에 진학해 좋은 일자리를 구하는 경우는 극히 제한적이. 지금도 세계의 수많은 여성들이 충분한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하거나,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로 인해 불투명한 미래를 고민하고 있다. 설사 성공의 기회를 얻었다 하더라도 임신과 출산, 육아로 인해 경력단절의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태반이다아랍권이나 아프리카의 국가에서는 조혼, 인신매매, 성 착취 등으로 고통을 받는 여성들도 많다. 이들에게는 인간다운 삶을 꿈꾸는 것조차 사치가 된다.


UN의 여성 차별 관련 광고 캠페인

여성의 사회 진출 기회가 많아지면서 유리천장을 뚫고 성공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지만, 성공한 여성에게 가해지는 공격과 방해도 만만치 않다. ‘된장녀’ ‘김치녀 등으로 대변되는 여성 비하 문화만 봐도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기는 참 고단한 일이다. 심지어 여성이 여성에게 배타적인 경우도 다반사다<여자의 적은 여자다>의 저자인 필리스 체슬러는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남성으로부터 배제되지 않기 위해 여성 스스로 여성을 공격한다고 분석한다.


사회에서 여성의 적절한 성역할을 찾는 것도 어려운 문제다. 페이스북의 최고운영책임자(COO)인 셰릴 샌드버그는 자신의 저서 <린 인(Lean In)>에서 여성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외부의 장애물뿐만 아니라 내면에 자리한 장애물에 걸려서도 넘어진다고 지적한다. 많은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자신감이 부족하고, 기회를 잡기 위해 적극적이지도 못하며, 원하는 것을 강하게 요구하지도 못한다. 그런 행동이 여성스럽지 못하다는 사회적 시선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의 최고운영책임자(COO) 셰릴 샌드버그의 저서 <린인(Lean In)>

어린 시절, 여성의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순간이 기억난. 초등학교 3학년, ‘아이스께끼를 하는 남학생을 쫓아가 때려눕힌(!)  여자도 아니야!”라는 말을 듣고는 왠지 모르게 부끄럽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숏커트 머리에 보이시한 스타일에 매료됐던 나 스스로를 이유없이 머쓱하게 여길 때도 있었다. 성차별을 별로 경험하지 않았다고 여기는 나 역시 무의식중에 성역할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의식했던 것이다.


산후조리를 도와주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계신 친정 엄마께 당신의 딸이 여성스럽지 못해 걱정스러운 적이 있었는지 여쭈었다. 엄마의 답은 이랬다. “여성스럽다고 느낀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여성스럽지 않다고 느낀 적도 없는데? 그냥 그게 네 스타일이라고 생각했지, .” 순간, 엄마 덕분에 그동안 여성이라는 틀 안에 갇히지 않고 씩씩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같아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성별로 인한 결핍 없이 자랐기에 이따금 마주하는 현실적 문제에 대한 면역력이 부족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품에 안겨 있는 딸아이를 보자 문득 걱정스러운 마음이 피어오른다. 성별을 떠나 열심히 살라고 격려해줬다가, 어느 날 여성의 이름의 벽에 맞닥뜨리게 될 때 느낄 당혹감과 배신감에 대해 뭐라고 설명해주지? 나이 서른이 넘어서야 출산과 육아 문제로 여성이라는 벽을 마주한 엄마는 너를 낳고서야 준비되지 않은 숙제를 풀어가느라 머리가 지끈거렸다고 일찌감치 이야기해주어야 하나. 남편 말마따나 이 험한 세상에 너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이런저런 생각만 많아지는 밤이다

 

 

*이 글은 2015년 5월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블로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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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에 관해 이야기할수록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 남성 혐오(man-hating)’와 동의어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20149UN 총회에서 배우 엠마 왓슨이 ‘He for she’라는 주제로 연설한 내용 중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이었다. 도대체 왜,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 남성을 배척하고 혐오하는 일과 연결되고 있는 것일까?



UN 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배우 엠마 왓슨.


한 달 뒤 한국에서는 남성의 여성 혐오현상을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금은 남자가 차별받는 시대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다. 그래서 IS가 좋다.”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말을 남기고 터키로 떠난 10대 소년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팝 칼럼니스트 김태훈은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스트가 더 문제라는 칼럼으로 도마에 올랐다. 페미니스트에 대한 남성들의 혐오감은 어느 정도이기에 IS라는 극단주의의 대척점에 놓이는 지경이 된 걸까?


이쯤해서 페미니즘의 정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5년 전 대학 <여성학개론> 수업에 사용됐던 개론서를 펼쳐 뒤적여봤다.


여성이 사회 속에서 그리고 일상적인 생활세계에서 자신의 미래의 지위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을 의미있게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을 찾아내려는 노력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래서 여성과 남성이 모두 평등하고 양성의 존재가 다 같이 조화롭고 균형을 이루는 사회를 지향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현대사회와 여성, 우리사회문화학회, 2001) 본질적으로 페미니즘은 성불평등 없이 남녀가 조화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개념이며, 다만 그동안은 상대적으로 남성에 비해 불평등한 지위에 놓인 여성을 해방하기 위한 이론으로써 작동해왔다는 게 요지다.


페미니즘 운동에는 시대별로 변화의 흐름이 있었다. 18~19세기 자유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페미니즘이나 고전 맑시즘의 관점에서 본 페미니즘은 주로 사회구조적인 변화를 주창했다. 이후에는 다소 급진주의적인 관점의 페미니즘이 등장했는데, 가부장제의 산물인 여성 억압의 문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성중심적인 문화를 타파해야 하기에 여성의 주된 적을 남성으로 상정하는 등 편견의 문제를 낳기도 했다.


이어진 제3의 흐름은 더욱 진전된 개념으로, 여성 문제를 환경오염, 인종차별, 빈곤 등 인류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사회 문제로 보고 남성과 여성의 공동체 의식을 기반으로 해결해가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올바른 페미니즘의 개념은 바로 이 제3의 흐름과 연결되어 있었고, 때문에 페미니즘을 늘 도덕적으로나 운동적 차원에서 정당한 개념으로 이해해왔다.


그런데 요즘 10대 남학생들을 비롯해 많은 남성들에게 페미니스트란 나대기 좋아하고 잘난 척이 심한 여자’(경향신문 201537일자)라는 뜻으로 통용된다고 한다. 언제 이렇게 페미니즘에 대한 정의가 뒤틀려버렸나눈을 한 번 더 비비고 봐야 할 정도다인터넷에서는 페미년’, ‘꼴페미등 페미니스트 여성을 욕하는 용어가 심심찮게 사용된다. ‘된장녀’, ‘개똥녀’, ‘김치녀등 일반 여성을 비하하는 말들신조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곤 한다. 모두 여성에 대한 극심한 혐오감에 기반을 둔 현상이다. 남성은 왜 이렇게 여성을 미워하게 되었을까.


오랜 기간 서구를 중심으로 진화해온 페미니즘 운동의 흐름이 해방 후 한국 사회에 한꺼번에 도입되면서, 한국의 페미니즘은 여러 단계의 페미니즘 운동이 뒤섞인 채로 운용되었다. 1990년대 이후 군 가산점 폐지 문제, 여성부 출범 후의 흐름들은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이 급진적인 운동의 조류로만 다가왔을는지 모르겠다. 실제로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확대되고 여권 신장의 결과가 가시적으로 드러나자, 많은 남성들은 여성에 대해 자신의 밥그릇을 빼앗는 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기 시작했다. 물론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삼는 일부 여성들의 모습도 이런 인식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작동했다고 본다.




하지만 여성의 지위가 수십 년 전의 한국 사회와 비교해 과연 얼마나 높아졌을까. 1970~1980년대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여성의 사회 참여 기회가 확대된 후 이른바 알파걸로 자라 상위 계층에 편입한 일부 여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한국 여성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일자리에 전전하며 남성 임금 50~60% 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다. 이 밖에도 여전히 가부장제의 잔재가 남은 한국 가정의 문화, 여성 피해자가 대다수인 성폭력 사건들, 성매매 및 성 상품화 문제. 진작된 일부 여성 권익의 문제 뒤에 숨은 여성의 불평등한 지위 문제는 여전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렇게도 혐오스러운 문제가 되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볼 문제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일 정도의 혐오에 휩싸이는 동안, 우리 삶에 더욱 본질적인 문제는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를 뒤덮고 있다. 바로 신자유주의 시대가 초래한 노동의 위기. 신자유주의는 신성한 노동의 가치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자본으로 대체하는 ‘반노동’적 시스템이다. 과거에 남성들이 갖고 있던 기득권을 자동으로 유지시켜주는 체제가 아니다. 오늘날 남성들의 ‘여성 혐오 현상은 경제적 불안정과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을 맞닥뜨리자, 이에 맞서기보다 그 속에서 경쟁자로 등장하기 시작한 여성을 적으로 상정해 배척부터 하고 보자는 데서 비롯됐다.


남성을 루저’로 만드는 것은 여성이 아니다. 여성이 싸우는 것은 남성을 루저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평등한 사회에서 남녀가 함께 공존하고자 스스로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헐뜯고 혐오하느라 에너지를 낭비하는 사이에, 인간다운 삶을 좀먹는 신자유주의라는 거대 괴물은 오늘도 우리를 갉아먹고 있다. 누군가를 루저로 만드는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고 해서 나 아닌 누군가를 끌어내리는 것부터 하고 보자는 사회가 과연 제대로 된 사회일까. 뒤틀린 페미니즘 논쟁에 대한 답은 이 지점에서부터 다시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이 글은 2015년 4월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블로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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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복직한지 6개월째다. 그런데 곧 다시 휴직을 하게 됐다. 둘째 아이 출산 때문이다. 4월이면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된다.

 

지난해 9월 복직을 앞두고 나를 당혹케 한 것은 둘째 아이의 임신 사실이었다. 1년 3개월간의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끝에 돌아가는 직장에 "저 또 임신했어요"라고 말하기는 여간 면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복직과 재휴직에 들어가는 사이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만 근무해야 하기 때문에 '경력 단절'에 대한 부담감도 컸다. 더군다나 우리 회사의 경우 여기자가 둘째 아이까지 육아휴직 1년을 꽉 채워 쓴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첫 번째 사례의 주인공이 되는 것도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친한 회사 여선배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선배는 나의 경력단절 문제를 가장 우려하셨다. 모성보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차츰 개선되고 있기에 공개적으로 육아휴직으로 인한 경력단절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선배의 말씀을 듣고 처음에는 육아휴직을 하지 않고 출산휴가만 쓰는 것도 고려를 해보았다. 때문에 복직 후 임신 사실이 알려진 뒤엔 "이번에도 1년 쉴 거냐"라는 질문에 한동안 "생각 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6개월간 '워킹맘'으로 짧게나마 살아본 지금은 입장이 확고해졌다. 1년의 육아휴직을 꽉 채워 쓰기로 결심했다. 아니, 그것은 불가피한 결정이다.

 

나처럼 친정과 시댁이 모두 지방이면서 양가로부터 육아를 지원받을 수 없는 '나홀로' 워킹맘은 어쩔 수없이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거나 사설 기관으로부터 이모님을 고용해야 한다. 복직하며 말도 못하는 16개월짜리 첫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면서도 가슴이 무척 아팠는데, 돌도 안 된 둘째 아이를 남에게 맡긴다는 상상을 하니 결코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건 도무지 엄마로서 용납이 안 됐다.

 


아동 학대 사건이 있었던 인천의 어린이집. 출처 : 경향신문 DB


마침 지난해 말 전 국민을 충격과 분노에 휩싸이게 했던 인천 송도 어린이집 폭행 사건은 더욱 그런 결심을 굳히게 했다. 물론 지금 첫째 아이를 돌봐주고 있는 어린이집 선생님들은 절대 그렇지 않으리라 믿고 있지만(그저 믿을 수밖에 없다), 사건을 접한 뒤로는 한동안 '혹시 지금 내 아이도 고통받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자꾸 일어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아이를 맡기고 찾아올 때마다 선생님께 "요즘 스트레스 많이 받으시겠어요. 선생님처럼 좋으신 분도 많은데..."라고 아부 겸 안부를 물었지만, 속으로는 '우리 아이한테 잘 대해주세요'라는 마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다.

 

이제 만 20개월이 된 아이는 4개월간의 어린이집 생활 때문인지, 아니면 그 월령 때에 나타나는 특징인지 여러 변화를 보이고 있다. 말이 늘고 고집을 피우기도 하며 자기주장과 표현이 확실해졌다. 나는 그러한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는 매 순간을 아이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종종 슬퍼지거나 우울해지곤 했다. 아이의 가장 빛나는 순간들을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만큼 괴로운 일은 없었다.

 

한번은 평소보다 30분 정도 늦게 아이를 데리러 갔는데, 아이가 나를 보자마자 주저앉아 펑펑 울어버린 적도 있다. 선생님 말씀으로는 비슷한 이름의 또래 아이가 있는데 10분 전쯤에 그 아이 엄마가 다녀갔다는 것이다. 그 아이를 부르는 소리를 자신을 부르는 소리로 착각하며 뛰어갔다가 엄마가 아니어서 실망했다고 한다. 우리 아이는 아마도 '엄마가 올 시간이 지났는데...'라는 생각으로 엄마를 목 빠지게 기다렸을 것이고, 문소리가 날 때마다 그쪽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날은 가슴이 아파 아이를 많이 안아주었다.


하루는 남편이 평일에 쉬어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하루 종일 아이를 본 적도 있었다. 남편은 하루 종일 지내다 함께 낮잠이 들었는데, 일어나보니 아이가 잠에서 깼는데도 눈을 말똥말똥 뜨고 가만히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한다. 어린이집에서의 습관 때문이었다. 어린이집 선생님께서 "낮잠시간에 함께 잠들다 먼저 깨면 불이 꺼져있기에 다른 아이들이 깰때까지 누워서 뒤척뒤척한다"고 하시더니, 이게 그런 것이었다. 낮잠을 자다 깨도 칭얼거릴 사람이 없으니 20개월짜리 아기가 그냥 혼자 그 시간을 버티는 것이었다.

 


어린이집 하원길.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둘째 아이도 최대한 오랫동안 엄마의 숨결을 느끼며 자라게 하고 싶었다. 첫째 아이에게도 엄마가 늘 곁에 있다는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어느 설문 조사에서 '그나마' 육아휴직 1년을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심리적 마지노선이 첫째 아이까지라는 결과에 공감하며 부담을 가득 안고서, 그래도 눈 질끈 감고 둘째 아이도 1년을 휴직하려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엄마가 아니면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다. 보육도, 먹을거리도, 아이들의 안전도... 안심하고 사회를 믿고 기댈 수가 없다. 늘 감시하고 걱정해야 한다. 때문에 일하는 엄마들은 늘 갈림길에서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인데 버젓이 있는 육아휴직 제도를 포기하고 아이를 사회에,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는 사회의 시선은 가혹하다.

 

최근 좋은 교육을 받고 사회에서도 성취를 이룬 여성들이 가정으로 돌아가 주부로서의 삶을 선택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1960~1970년대에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사회 진출의 길을 열었지만, 막상 직장과 사회로 나간 여성들에게 직장과 가정생활을 병행하는 삶은 고통이었다. 여성주의 경제학자 낸시 폴브레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남성의 업무를 모델로 하는 근무 환경과 업무 리듬을 여성의 특성에 맞게 바꾸는 점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지적한다. 현대 사회의 일하는 여성은 어느 한 쪽을 포기하거나 누군가의 조력을 받지 않고서는 둘을 전혀 병행할 수 없는 구조 속에 있다.


페미니스트 이미지 사진


저널리스트 출신의 에밀리 맷차는 이러한 현상에 주목하고 <하우스 와이프 2.0>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여성들이 가정으로 돌아가는 현상을 관찰하며 이것이 그들이 일을 포기하거나 직장에서 실패해서라기보다, 좀 더 다른 삶을 실현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이야기한다. 가정으로 돌아가면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도 모른 채 아이에게 먹이는 간편 음식 대신, 직접 텃밭을 가꿔 신선한 채소를 밥상에 차려내거나 하루 종일 느긋하게 끓여낸 진짜 닭 육수로 국수를 끓여 먹는 일이 가능해진다. 우리가 제주도에서 유기농 텃밭을 키우는 이효리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자연적인 삶을 꿈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가정으로의 복귀가 여성들에게 권유 혹은 강요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은 안타깝고 화가 나는 현실이다. 이에 대해 에밀리 맷차는 "새로운 가정의 시대가 상당히 여성 중심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이 현상에는 여성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더 많은 남성들과 사회 전체가 이러한 현상에 주목하고 대안을 함께 찾아나가야 한다.

 

어린 아이를 내 손으로 직접 양육하고 싶은 부모의 마음은 가장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것이다. 그럴 수 있도록 법이 정한 틀을 활용하는 일 역시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을 앞둔 일하는 여성이라면 지레 마음이 불편하고 눈치가 보인다는 사실을 공감할 것이다. 가정으로 돌아가는 여성에 대한 세상의 잣대는 아무래도 '성취'나 '사회적 공헌'과는 거리가 멀며, 개인의 사회적 성취 욕구와도 상충되어 여성 스스로 가치관의 혼란을 겪게 만들기 때문이다.


일하는 엄마들은 대체 어떤 욕망에 더 귀 기울여야 하는 걸까. 둘을 병행할 수 있는 사회에서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은 둘 중 무언가를 선택을 해야 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음을 원망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육아휴직을 앞두고 돌아보니, 처음이나 지금이나 고민의 종류는 매한가지인데 그 '정도'만 더 심해진 것 같다.

 


*이 글은 2015년 3월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블로그에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이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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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은하 2015.03.24 14: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찡하네요 ㅠ.ㅠ 선배 잘 다녀오세요. 첫 사례가 되어 주시니 그저 감사하고 미안할 따름입니다. 육아휴직 쓰고 아이와 빛나는 순간 함께 하더라도 선배는 또 언제라도 현장에서 활약할 거 같은 느낌!!!! 그나저나 사촌오빠 얘기 들으니까 어린이집 보내도 동생과 함께 가면 좀 더 정서적으로 안정된다 하더라구요. 나중에 아이들이 엄마가 어떤 고민을 하고 선택을 했는지 알게 되면 틀림없이 자랑스러워할거에요.

  2. 딸기21 2015.03.24 20: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은이 힘내! 언제나 응원할께!

  3. 000 2015.03.25 07: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사자야 물론 그런 사례의 첫걸음이니, 애가 어쩌니 하면서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겠지만, 객관적인 입장에서는 그다지 좋게 보이지 않는군요. 임신과 출산은 어디까지나 자신만의 개인적인 스스로 선택한 일인데, 그걸 빌미로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폐를 끼치고, 다른 누군가가 제대로 일할 수 있는 한 자리를 일은 하지 않으며 그냥 차지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1년 이상의 육아휴직과 그에 바로 연이은 또다른 1년간의 휴직..에 대해서 당사자께서도 전적으로 당당하다는 입장은 아니신 듯합니다. 그렇기에 육아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들을 장황하게.늘어놓는 등 무언가 정당화할 것을 강조하시는 듯하고요. 물론 기자분씩이나 되시니 이런 말을 하면 여성주의나 노동자의 보편적 권리 등등을 언급하며 논리적으로 제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논리나 정당성과는 다른 차원에서...실제로 일하며 이런 구성원들을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